19세기 동아시아는 서양 문물이 시나브로 흘러들던 시절이었다. 청나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길을 따라 조선에 전해진 낯선 지식은 낡은 질서에 금을 내고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다. 천주교를 믿고 포교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 집필에 몰두한다. 이 저술에는 섬 청년 장덕순(張德順, 일명 창대)의 기여가 컸다. 정약전은 서문에 다음과 같이 창대를 언급하며 함께 연구했음을 밝힌다.
"창대는 풀과 새, 물고기를 보면 세심하게 관찰하고 깊은 생각을 담아내어 그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나는 그를 불러 집에 머무르게 하면서 책을 엮었으니 이를 자산어보라고 지었다."
자산어보는 흑산도 인근 바다 생물 220여 종의 생태를 기록한 명저다. 원래 그림을 넣어 '해족도설'이라는 도감 형식을 구상했으나 문자로만 자세히 풀어냈다. 동생 정약용이 그림의 왜곡을 염려하며 글자로 기술하기를 권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필사에 의존했기에 화공의 역량에 따라 그림의 정확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정약전은 생선의 작은 가시까지 기술할 정도로 세심하게 살폈으니 물고기를 해부하여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자산어보에는 "영남산 청어는 척추뼈가 74마디, 호남산 청어는 53마디"라는 내용이 나온다.

▲자산어보.어부의 집에 벽지로 붙어 있던 자산어보를 동생 정약용이 제자 이청에게 시켜 필사 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최초의 생물학 연구자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책으로 엮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삶을 마감했다. 다산이 형을 찾아가보니 원고는 한 장씩 뜯겨져 어느 어부의 집에 벽지로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일부는 사라졌지만 정약용이 제자 이청을 시켜 필사를 했으니 지금의 자산어보가 남은 까닭이다.
정약전이 대륙 문명과 접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난학(蘭學)을 통해 해양 문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막부가 쇄국 정책을 펴는 중에도 나가사키(데지마 섬)에 네덜란드인이 거주하면서 서양 문물이 가늘게 스며들었다.
당시 에도에는 두 명의 사무라이가 활동했다. 마시야마 마사카타(増山正賢, 1754~1819)와 쿠리모토 탄슈(栗本丹洲, 1756~1834)다. 전자는 나가시마번의 5대 다이묘로서 학문과 예술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마사카타는 문인 번주로서 산수화와 화조화에 능했다. 특히 <곤충첩(虫豸帖)>은 풀벌레를 정밀하게 그려낸 에도 시대 박물학의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의 화첩에는 곤충 뿐 아니라 파충류와 담수어가 매우 사실적으로 등장한다. 개인적인 관심에서 그려낸 화보집임에도 그림의 완성도 및 예술성에서 박물도감의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곤충첩은 도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곤충첩 - ColBase(국립문화재기구 소장품 검색 시스템)에서 볼 수 있다.마시야마 마사카타가 펴낸 화첩으로 수백 종의 곤충 그림이 나온다. ⓒ 도쿄국립박물관(TNM)

▲천충보(千蟲譜) - NDL(일본 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에서 볼 수 있다.쿠리모토 탄슈가 펴낸 천충보 필사본에 나오는 벼룩과 이. ⓒ 쿠리모토 탄슈(일본국립국회도서관)
후자는 무사이자 막부의 어의(御醫)로서 <천충보(千蟲譜)>를 펼쳐냈다. 일본 최초의 곤충 도감으로 인정받는 책이다. 의사이자 본초학자의 관점에서 학술적 분류와 식별 정보 제시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나 벼룩과 이(蝨) 같은 기생충은 색을 입히고 몹시 크게 그려 넣었다. 3mm가 넘지 않는 곤충을 정밀하게 묘사했으니 난학을 통해 현미경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3권으로 엮은 천충보에는 곤충 뿐 아니라 포유류, 식물, 어류까지 폭넓게 수록했다. 분류학적 완성을 위해 일부 해양 생물은 다른 책에 있는 내용을 삽입하여 학술서로서도 충실하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30여 점이 넘는 필사본이 남아 그 위상을 알려준다.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글'로 완성했다면 동시대 일본의 무사 계급은 '그림'에 방점을 두어 박물도감의 수작을 남겼다. 각자의 환경에서 생물 연구에 매진했던 사실은 근대 학문 사조가 싹트던 순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달 후 운영중인 홈(www.daankal.com)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