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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 송파도서관부끄럽지만 내 이름으로 첫 도서관증을 만들었다. 그동안 부티나게 살았던 것을 알게 된 순간. ⓒ 정현주
"혹시, 책도 읽고 노트북 사용도 가능한 열람실은 어디인가요?"
지난 2일 아침, 서울 송파도서관 1층 로비. 오십을 훌쩍 넘긴 내가 열람실을 묻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다. 노트북과 노트, 다섯 권의 책, 멀티탭과 충전기까지. 어깨에 멘 가방은 여행자의 배낭처럼 묵직했고, 발걸음마저 낯선 나라에 도착한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렇다. 나는 오늘, 도서관 여행자다.
그해 여름과 가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외로웠던 계절이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익숙했던 소속감을 잃었다.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은 하루는 막막한 우주같았다. 그 무렵 나를 가장 편하게 맞아준 곳이 도서관이었다. 소속없는 내게 도서관 회원증은 다른 세계로 향하는 출입증이었다.
- <삶은 도서관> 69p.
얼마 전, 딸기우유빛 표지가 유난히 따뜻한 산문집을 만났다. 인자 작가의 <삶은 도서관>. 광고·홍보 일을 이십여 년 하다 퇴사한 저자는 공공 도서관 공무직으로 재취업했다. 뒤늦게 얻은 늦둥이처럼 소중한 일자리에서, 사람과 책 사이를 오가며 마주한 순간들을 유머와 성찰로 기록했다.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찌찌뽕'을 외치게 된다. 광고, 홍보, 퇴사. 공백, 고민... 이건 누가 봐도 나의 레퍼토리 아닌가. 그런데 책장이 넘어갈수록 낯선 세계가 펼쳐졌다.
"도서관이...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라고?"
그 순간, 책 한 권이 내게 도서관의 문을 열어주었다.
퇴사 후, 나를 도서관으로 데려온 것들

▲삶은 도서관이 송파도서관에 왔다이 책을 읽고 도서관에 관심과 흥미가 생겼다. 진짜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도서관이 그렇게 재미있는 곳이라고? 인생이 담겨있다고? ⓒ 정현주
퇴사하던 작년 이맘때, 나는 세 가지를 계획했다. 허리가 아플때까지 잠 자기. 눈이 튀어나올 때까지 책 읽기. 지금까지 안 해보던 것 해보기. 그런데 첫 번째부터 틀어졌다. 퇴사하면 잠이 총량을 맞추러 달려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많던 잠신은 도망갔고, 아침은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찾아왔다. 결국 잠 대신 허리가 아플 때까지 책을 읽기로 했다.
작년 독서량은 연간 5권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퇴사 후, 마치 눌러두었던 스위치가 켜지듯 책에 미친 듯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소설, 인문, 에세이, 치유서... 독서모임까지 가입해 '벽돌책 격파'에 도전하며 1년을 보냈다.
무직자의 가벼워지는 지갑은 도서관이라는 공공재를 떠올리게 했다. 독서는 일석이조가 아니라 '연계상품'이었다. 결국 안 해본 일까지 다이렉트로 지난 10월 24일, 생애 첫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다섯 권의 책을 대여했다. 금액으로 치면 6만6780원. 주차 한 시간도 무료였다.
갓벽한 무료의 날. 그날만큼은 나라에 낸 세금이 아깝지 않았다.
회사와 집 사이에서 허덕거리던 시절, 주말을 도서관에 반납할 생각이 없었다. 주말을 얻는 대신 책 스무 권을 온라인으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열심히 벌어서 책 사는 것도 애국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며, 돈으로 시간을 샀다. 그랬던 내가 지금, 무료대여 다섯 권과 무료 주차 한시간에 감동하고 있다니 정말, 인생은 오래 살아봐야야 한다.
책 반납을 위해 2층 어학문학실로 갔다. 가벼워진 가방만큼 마음도 가벼워졌다. 신간 코너를 둘러보는데, 나란히 앉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보였다. 평일 한 낮에 이 둘은 무슨 사연으로 이곳에 있을까. 그러자 책 속 '도서관 이모'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도서관에서의 연애가 그나마 건전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그들의 연애가 펼쳐지는 곳이 하필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식이 도서관에 간다고 하면 무조건 기특해진다. 커피값 하라며 넉넉히 용돈도 쥐여준다. 그럼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부모의 신뢰를 담보로 한 도서관 연애는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들의 부모를 대신해 순찰을 돈다. - 24~25p.
나도 모르게 사서를 향해 속으로 눈짓을 날린다. "이모, 얘네 좀 지켜봐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은 조용한 곳이 아니다. 삶의 기상천외한 장면들이 잠시 쉼표를 찍고 가는 곳이다. '젓가락 살인' 책이 있는지 묻는 전화가 알고 보니 '젓가락 달인'이었고, 너덜너덜한 책을 살리는 '책 봉합의 달인'이 있었고. 방귀 뀌고 사라지는 어르신, 멋진 신사가 책상 밑으로 발바닥을 긁는 모습, 코딱지 파는 아이들까지 도서관은 고요한 듯 소란하고, 소란한 듯 다정한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서가에서 책을 고르며 '체험 삶은 도서관'을 현실판으로 구경한다.

▲도서관에선 라면이지추억의 냄비우동을 찾았지만 라면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도서관은 맛집이었다. 다음에는 분식 떡튀어 3종세트에 도전! ⓒ 정현주
배꼽시계가 알람을 울린다. 사실 도서관 하면 냄비우동이 아니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없다. 라면을 주문하고 기다리다보니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한 겨울 새벽 3시에 머리를 감고 정독도서관으로 향하던 그때, 핸드폰도 없고 등골 롱패딩도 없던 시절, 그 추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입고 서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도서관 오픈런을 위한 일렬의 줄은 또렷했다.
그렇게 선착순 좌석을 받고 열람실에 앉으면 몇시간동안 오들오들 떨었던 추위와 실내의 난방에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빳빳하게 고드름을 맺었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도 한다.
'10분만 몸 좀 녹이고 공부해야지.'
그러다 눈을 뜨면 12시였다. 식당으로 향한다. 메뉴는 온리 원. 냄비우동 하나다. 찌그러진 납작한 양은 냄비에 우동과 국물, 고춧가루 톡톡, 국물위에 누워있는 단무지 세 조각. 도서관은 그 시절, 단잠과 포만감을 허락한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도서관에서 내 삶을 다시 배열하다
책 속에서 저자는 잘못 꽂힌 책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오배열'이라 부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정배열보다는 오배열에 가까운 사람이다. 숫자보다는 문장을, 질서정연함보다는 자유로움을 사랑했다. 창의력이란 잘 닦인 길(정배열)이 아니라, 예기치 않는 길(오배열)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p29>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배열일까, 오배열일까? 열심히 일 했고, 스스로 선택한 퇴사였으니 정배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전업주부라는 이름, 부르지도 않는데 자꾸 따라오는 옛 직함, 글을 쓰고는 있지만 불확실한 하루, 오배열인가. 어쩌면 나는 정배열과 오배열의 중간, 서가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바보처럼 이 나이에, 처음으로 도서관증을 만들고, 처음으로 열람실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너무 비싼 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돈으로 시간을 사고, 효율로 감정을 계산하고, '열심히'만 외치며 주위를 잊고 살았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꾼다고들 한다. 나에게는 그 한 권이, 내 삶의 자리를 도서관에서 다시 배열해주고 있다. 지금이 내가 정배열인지, 오배열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더 이상 엉뚱한 자리에 꽂힌 책이 아니다. 도서관이라는 선반에서, 나는 조금씩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