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사는 동네는 오래된 빌라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는 밀집 주거 지역이다. 낮에는 공사 차량이 지나다니고, 가림막으로 가려진 공사장들에서 쉼없이 소음을 만들어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해가 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서로 등을 맞댄 가로수와 낡은 폐건물들이 골목을 완전히 가려버리고, 가로등이 닿지 않는 곳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라앉는다. 공사 자재와 철근이 길 위에 길고 뒤틀린 그림자를 만들며, 도시의 한가운데임에도 폐허에 가까운 기운을 풍기는 공간이 된다.
그 길을 지날 때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걷게 된다. 며칠 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기때문. 술을 마셨는지 내 뒤에서 비틀대며 걸어오던 한 남성이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흔들리는 발걸음이 내 뒤를 빠르게 따라왔다. 도망칠 만한 틈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척 빠르게 걸었지만, 심장은 한 걸음마다 크게 요동쳤다. 겨우 큰길로 빠져나왔을 때에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다른 길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으로 통하는 길은 많았지만 공사 차량에 가로막혀 있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해가 떨어지는 시간은 빨라졌고, 실제로 위험을 겪은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귀갓길은 긴장의 시간이 되었다.
사실, 그 골목 한가운데 바닥 조명이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작년쯤 부천 곳곳에 설치되었다는 기사도 스치듯 봤고, 내가 사는 동네에도 몇 군데 들어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진 그저 "CCTV 안내 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림이 귀엽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존재가 갖는 의미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고보조명CCTV촬영중, 집중순찰구역이라 적힌 고보조명의 디자인이 귀엽다. ⓒ 유수영
그런데 그 사건 이후 처음 다시 그 길을 지났을 때, 조명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주변은 여전히 칠흑 같은데, 바닥 위에 퍼진 둥근 빛과 그 안에 선명하게 박힌 "CCTV 촬영 중, 집중순찰구역"이라는 문구는 이전과는 다른 무게를 가졌다. 그 조명은 갑자기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누군가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는 하나의 보호막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시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마트를 가던 길에 지구대에 들렀다. 그날의 일을 설명하며, 이 구역의 야간 순찰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담당 경찰은 이 지역이 '야간 위험 신고가 잦은 구역'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말했다. 노후된 건물과 공사 구간이 겹쳐 조도가 낮고, 가로등을 추가로 설치하기 어렵거나 예산이 지연된 곳이 많아 순찰의 필요성이 높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최근엔 밤 11시 이후 순찰 횟수를 더 늘렸다"고 말하며 "술 취한 사람의 폭언도 분명 위협 상황이니 반복되면 즉시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바닥 조명 중앙에 비상 버튼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위급 상황에서 그 버튼을 누르면 지구대로 즉시 연결된다고 했다. 버튼이 작동하면 조명 주변으로 경고등이 번쩍이며 위치가 전송되고, 가장 가까운 순찰차가 출발한다고 했다.

▲눈 오는 날의 고보조명손이 닿는 위치에 비상벨 버튼이 빛을 내고 있다. 내리는 눈에 빛이 반사되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케 한다. ⓒ 유수영
경찰은 "이 조명은 단순히 범죄 예방 목적만 있는 게 아니라, 어두운 골목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민에게 알려주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 그 말은 조명이 이전보다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된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이 사실을 같은 동네에 사는 주민 몇 명에게도 알렸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살아온 분들 대부분이 그 조명 기둥에 비상벨 버튼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닥에 조명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단순한 경고 표시가 아니라 실제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장치라는 점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 주민은 "아이 학원 데리러 가는 길이 늘 걱정이었는데, 이런 기능이 있다면 마음이 조금은 놓일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어린이 유괴 사건 기사로 한동안 시끌시끌했던 만큼, 그는 이런 안전 장치가 훨씬 적극적으로 알려져야 한다고 했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꼭 설명해주겠다는 말이 뒤따랐다.
어둠이 만든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적어도 이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에게 정보를 나누며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다. 길 위의 조명 하나는 그렇게 이 동네 사람들의 귀갓길을 아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