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온통 하얗다.
대관령 자락에서는 칼바람이 쉼 없이 몰아치고, 산과 들녘은 깊은 한겨울에 잠겨 있다. 그러나 바다는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파도 위로는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치고 있었지만, 바닷속에 스며든 햇빛이 잠들어 있던 생명을 깨우며, 육지보다 한발 앞선 봄을 전한다.
대한을 앞둔 날, 사람들은 바다로 향했다

▲경포호수와 사근진 앞바다 ⓒ 진재중
1년 중 가장 춥다는 절기 '대한'을 사흘 앞둔 17일, 사람들의 발길은 육지가 아닌 바다로 향했다. 육지보다 먼저 봄을 맞이하는 바닷속에서 해조류의 변화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는 강릉 경포해변과 인접한 사근진 앞바다로, 해변에서 접근하기 쉬운 멍게바위 일대다. 이곳은 한때 참 다시마가 자생하던 곳으로, 멍게바위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 과거 해조류와 함께 멍게를 비롯한 어족 자원이 풍부했던 해양 환경을 간직한 지역이다.
바닷속에서 먼저 시작된 봄의 신호

▲단단한 암반에 자리잡은 해조류 군락(고프로 촬영) ⓒ 진재중

▲육지보다 한 계절 먼저 봄을 알리는 해조류가 바닷속에서 연둣빛 생명을 틔우고 있다.( 고프로촬영 ) ⓒ 진재중
암반 위에서는 어린미역이 물결을 따라 넘실거리며 춤을 춘다. 겨울 동안 성장을 멈췄던 해조류가 다시 생기를 되찾는 순간이다. 미역은 예로부터 바다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해조류로 알려져 있다. 육지의 봄나물이 제철을 맞기 전, 바닷속에서는 미역이 가장 먼저 밥상에 오른다.
미역이 자라는 곁에서 도박이 붉은잎을 자랑하며 넘실거린다. 암반과 돌 틈 사이에서는 홍합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바닷속에서 어느새 봄이 스며들었음을 말해준다. 서로 다른 종의 해조류와 해양생물이 같은 암반 위에서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수중 풍경화를 연상케 했다. 해조류가 자라기 시작하면 어린 물고기와 다양한 해양생물이 모여들고, 해조류 숲은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곧 바다 생태계 회복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반가운 신호다.
수중에서 마주한 바다의 공백

▲해조류를 지켜보는 탐사대원들(2026/1/17) ⓒ 진재중
그러나 희망적인 장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바닷속을 가득 메웠던 다시마 군락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다양하던 해조류도 예전 같지가 않다. 한때 '해조류의 백화점'이라 불리던 이 일대는 곳곳이 비어 있었고, 하얗게 드러난 암반이 눈에 띄었다.
수중 촬영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온 한규삼 박사는 새롭게 돋아나는 해조류를 보며 반가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는 "다시 자라기 시작한 모습은 인상적이지만, 전체 개체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수중 영상을 지켜보던 전찬길 사단법인 해양생태복원협회 이사장 역시 우려를 표했다. 전 이사장은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실제로 확인해 보니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며 현장의 현실을 전했다. 과거 이곳에서 다시마를 채취하던 기억, 파도에 흔들리던 해조류 숲의 풍경은 이제 추억이 돼버렸다. 눈으로 확인한 바닷속은 더 이상 예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먹거리를 넘어 생태로, 시민의 인식이 바뀌다

▲오늘 바다에서 채집한 해조류를 바탕으로 표본 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진재중
탐사 이후에는 해조류 표본을 활용한 현장 설명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실제 표본을 통해 해조류의 구조와 종별 특징을 살펴보며, 그동안 '먹거리'로만 인식해 왔던 해조류를 생태 자원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현장에 참여한 김진숙 박사는 "해조류는 바닷속에 있어 잘 보이지 않다 보니 관심을 두지 않았다"며 "이번 탐사를 통해 해조류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를 실감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해양 생태계의 균형을 지키는 데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새롭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성 참가자는 미역과 다시마, 톳이 미래 식량이자 바다 생명을 살리는 근원임을 체감했다며, 이번 행사에 참여한 것이 뜻깊었다고 전했다.
사근진에서 이어진 질문, 시민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라진 다시마와 갯녹음 현상에 대한 영상을 시청하는 대원들(2026/1/17) ⓒ 진재중
이날 참가자들은 사근진 어촌계 사무실에 모여 해안환경의 심각성과 해조류 감소 실태를 다룬 영상을 시청했다. 이어 무분별한 연안 개발과 해안도로 건설, 생활 오염이 해조류와 해양생물에 미친 영향을 공유하며, 바다숲 조성을 위해 시민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보호 방안을 논의했다.
한 참석자는 과거 바다가 풍요로웠던 영상을 보며,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렸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영상을 시청한 김형근 강릉원주대 명예교수는 "바다 환경에 맞는 해조류 포자를 지속적으로 연구·개발해 바다 사막화를 막아야 한다"며 "이제는 지켜보기만 할 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설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수중조사에 동행한 전)국립수산과학원 김영대 박사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온 상승이 동해안 전반의 해조류 감소를 가속화하고 있다"며 "이는 단순한 해조류 종 감소를 넘어 해양 생태계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경고 신호"라고 설명했다.
봄이 먼저 온 바다, 그러나 위기도 함께 다가온다

▲햇볕이 잘 드는 암반사이에 터를 잡은 해조류 ⓒ 진재중

▲파도에 몸을 맡기고 암반에 싹틔운 해조류 ⓒ 진재중
산과 들녘은 여전히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바다는 한 계절 앞서 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파릇하게 움트는 해조류는 봄의 신호이자, 동시에 바다가 보내는 경고였다.
바다는 지금 분명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변화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위기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행동할 것인가. 한겨울 사근진 앞바다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곧 우리 모두에게 향하고 있었다.
▲바닷속 봄 바다
육지보다 한계절 앞서가는 바닷속에서 봄 소식을 먼저 알리는 해조류 진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