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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 표지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 표지 ⓒ 김양오

지난 26일, 남원 노암동 남원시립국악연수원 가야금교실에는 60여 년 전에 여성농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국악인 할머니 네 분이 모였다. 이날, 이들 네 분의 여성 농악 활동을 엮은 책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김양오 노영숙, 민속원, 2025)의 출판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이 책의 주인공인 네 할머니는 여성농악대에서 상쇠, 장고, 벅구(소고) 등을 공연했었다. 이 책은 2021년 3월부터 2025년 5월까지 네 원로들이 다시 모여서 전개한 활동의 놀라움과 감동 그리고 슬픔을 다큐멘터리로 엮었다.

이 책의 출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사례로 평가받는 축제인 춘향제 역사의 의미 있는 한 단면을 기록하여 사라질 뻔한 기억을 복원한 작업이었다. 이 책 한 권에는 남원역사연구회 회원들의 춘향제 역사를 찾아가는 몇 년의 노력과 과정의 서사가 담겨 있었다.

남원역사연구회 회장 강경식은 2021년 초에 춘향 영정과 춘향제 탄생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1931년 5월 28일 자 신문 기사를 발견하였다. 춘향사당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젊은 여인의 얼굴이 담겨 있는 흑백 사진 기사의 제목은 '새로히 창건된 춘향사와 춘향사 창건을 발의한 최봉선 예기'였다.

 1931년 5월 28일 자 춘향제 최봉선 내용 신문 기사 (남원역사연구회 자료)
1931년 5월 28일 자 춘향제 최봉선 내용 신문 기사 (남원역사연구회 자료) ⓒ 남원역사연구회
 2021년 3월 초, 최봉선 찾기 현수막. 남원역사연구회
2021년 3월 초, 최봉선 찾기 현수막. 남원역사연구회 ⓒ 남원역사연구회

남원역사연구회 활동가들은 최봉선(崔鳳仙)에 관련된 자료를 찾으며 연구하였다. 그런데 최봉선의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서, 남원 시내 곳곳에 현수막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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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권번 으뜸 기생, 춘향제 창시자, 전) 부산관 사장
최봉선 여사에 대해 아시는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특이사항: 춘향사당 건립, 춘향제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온 생애와 재산을 바쳤으나 말년을 아는 분이 없음.
춘향사당 정상화를 바라는 시민모임 강경식(010-****-****)

최봉선은 부산 출신으로, 남원 예기조합의 대표 기생이었으며, 최초의 춘향제 제안자로 평가된다. 그녀는 춘향사당 건립과 영정 봉안, 제사를 지내는 춘향제의 시작을 주도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동안 전통 예술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으며, 남원의 항일 문화운동의 하나로 춘향제를 창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봉선은 춘향제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최봉선에 대한 남원 지역사회의 제보를 기다리는 과정과 남원역사연구회의 노력으로 1960년대에 여성농악단에서 활동했던 단원들이 몇 분 모이게 되었다.

장봉녀(95세), 1960년 창설, 여성농악대 상쇠였다.
박복례(82세), 소고를 치면서 상모를 돌렸으며, 공중제비와 자반뒤집기까지 해냈다.
배분순(81세), 장구를 치고, 소고춤을 추었다.
노영숙(71세), 여성농악대의 막내였고 소고춤을 추었다.

노영숙은 <향기조차 짙었어라>(노영숙 권은영, 민속원, 2018)는 안숙선 명창을 포함해 당시에 활약한 여성농악인 열 분의 이야기를 담은 여성농악 예인 구술집을 내었었다. 노영숙은 이 책에서 말했다.

여성농악단은 1959년에 남원에서 최초로 만들어졌고, 전국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예전에는 남자들만 농악을 했는데, 여자들이 꽃을 달고 뛰어다니며 농악을 하고 춤을 추니 인기가 많았어요. 그때, 남원여성농악단과 춘향여성농악단 두 단체가 있었는데, 남원의 여성농악단에 많게는 50명, 60명 정도까지 있었어요.

저는 춘향여성농악단의 막내로 해체될 때까지 있었어요. 유명한 안숙선 언니나 오갑순 언니도 그 당시 농악단의 꽃들이었지요.

노영숙은 1970년 '오사카 엑스포 70'에서 채상 소고 놀이로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10대의 노영숙이 소고를 치면서 상모로 긴 끈을 돌리는 공연에 외국인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에도 춤추고 노래하던 여자 가수 그룹은 있었다. 그러나 판소리, 가요, 연극, 농악과 만담, 열두발 상모 돌리기, 자반뒤집기 같은 어려운 기술까지 시행할 수 있었던 그룹은 남원의 여성농악대가 출발점이었다고 지역에서는 기억한다.

1960-70년대는 여성농악단의 시대라고 할 만했다. 여성농악단이 남원에서 결성되어 인기몰이하자, 호남여성농악단을 비롯해 전국에서 여러 여성농악단이 생겨났다.

그러나 여성국극(女性國劇)이 한순간에 사라졌듯이, 20여 년 이어진 여성 농악의 인기도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놓이고 읍내마다 영화관이 생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여성농악대 단원들은 모두 흩어졌고, '떠돌던 기생'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화려했던 경력을 자식들에게도 함구해야만 했다. 수십 년 동안 이분들의 존재는 완전히 묻혀 있었다.

2021년 3월에 남원의 역사연구회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여성농악대 단원들을 찾아냈다. 2021년은 남원 여성농악이 60여 년 만에 기억을 되살린 해였다. 장봉녀, 박복례, 배분순과 노영숙 할머니는 다시 괭가리, 장구와 소고를 손에 잡고 무대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남원역사연구회에서 활동하는 역사동화 작가 김양오는 최초의 지역 축제 '춘향제'를 만든 최봉선의 이야기를 <백 년 동안 핀 꽃>(김양오 글/곽정우 그림, 빈빈책방, 2021)으로 엮어서 출판했다.

2023년 4월 22일, 남산 국악당에서 남원 여성농악대의 일부 단원들이 60여 년 만에 서울 공연을 하였다. 舞風(춤바람), '어허! 저 허공중천의 춤, 배움이 아닌 겪음으로 그래 낸 창전항로'. 이 문구가 공연의 포스터 제목이었다.

"이분들이 저 영상 속의 인물들이십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걸그룹 남원 여성농악단 단원들이십니다!"

관객들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손뼉을 치며 여성농악단 원로들을 맞이하였다. 할머니들이 꽹과리를 잡고 장고를 메며 소고를 잡아 공연을 풀어나갔다. 농악의 꽃은 '농부가'였고, 60여 년 전 과거의 기억은 현실로 되살아났다.

 2023년 4월 22일, 남산 국악당 공연
2023년 4월 22일, 남산 국악당 공연 ⓒ 남원시청
 2023년 4월 22일, 남산 국악당 공연
2023년 4월 22일, 남산 국악당 공연 ⓒ 남원시청

"여보시오, 농부님들!"
"예이~"
"우리 서울까지 왔으니, 농부가나 불러 봅시다!"
"예이~"

김양오 작가는 자신이 엮은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 신간을 '글로 보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하였다. 이 책에는 남원 여성농악단 출신 네 분의 현재(2021년 3월부터 2025년 가을)와 과거(1960년대-70년대)를 함께 조명하고 있다.

1부의 현재 이야기는, 조용히 묻혀 살던 네 분의 원로들이 세상에 다시 나와 서울 무대에 서기까지 남원 시민들과 함께 활동한 이야기가 서술되었다.

2부의 과거 이야기는, <향기조차 짙었어라>(민속원, 2018)에 수록된 열 분의 구술 채록 중에서 1부의 주인공인 네 분의 내용을 다시 실었다.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 출판 기념회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 출판 기념회 ⓒ 이완우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 출판 기념회 이완우

이와 관련해 프란치스꼬 교황은 청년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달려가서 들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더 늦기 전에 이런 기록물이 사라질 뻔한 기억을 붙잡으며 역사로 남아야 한다.

구례군에 전승되는 구례 여성농악은 포장걸립 전통을 계승한 여성 전문 농악으로, 현재도 전남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공연과 전승이 이어지고 있다. 기능 보유자인 유순자(상쇠)와 유점례(설장구)를 중심으로, 무대 공연을 지속하며 지역 공동체 문화와 여성 예인 전통의 생명력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김양오 작가의 신간 <말허자면 우리가 걸그룹 시초여>는 사라진 남원 여성농악단의 과거를 추억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언어로 불러내어서, 남원 여성농악을 다시 '살아 있는 전통'의 궤도 위에 올려놓고 있다.

이 책은 남원 여성농악의 다음 세대를 향한 출발점이자, 늦기 전에 귀 기울여야 할 우리 사회의 소중한 증언의 기록이다. 이 책은 우리가 미처 듣지 못했던 할머니들의 시간을 통해,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왜 공동체의 미래를 여는 일인지를 조용히 묻고 있다.

#남원여성농악단#춘향제#최봉선#남원역사연구회#다큐멘터리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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