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천문인협회 회원 6명이 올해 시집을 출간했다. 한 해에 6권의 시집이 나온 것은 사천 문단 역사상 처음이다. 이 가운데 4명은 첫 시집이다. 등단 후 짧게는 6년, 길게는 14년 만에 내놓은 결실이어서 눈길을 끈다. 박재삼문학관 전경. ⓒ 뉴스사천
[뉴스사천=강무성 기자] 사천문인협회 회원 6명이 올해 시집을 출간했다. 한 해에 6권의 시집이 나온 것은 사천 문단 역사상 처음이다. 이 가운데 4명은 첫 시집이다. 등단 후 짧게는 6년, 길게는 14년 만에 내놓은 결실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들의 시에는 공통된 정서가 흐른다. 화려한 수사 대신 삶의 결을 따라가는 언어, 상실을 껴안고 다시 일어서는 힘에 대한 이야기다. 거창한 선언보다 소박한 다짐, 일상의 언어 속에 삶을 지탱하는 힘이 있다.
사천문인협회는 "이렇게 한 해 동안 시집이 많이 나온 적은 처음"이라며 "사천 문단의 르네상스를 맞은 것 같다. 각자 정진하고 공부하고 고민한 결과"라고 밝혔다.

▲조평자 시인이 등단 6년 만에 첫 시집 '맨드라미 사진관'을 펴냈다. ⓒ 뉴스사천
조평자 '맨드라미 사진관'
올해 가장 먼저 독자와 만난 시집은 조평자 시인의 '맨드라미 사진관'(시인동네)이다. 2019년 '시에' 신인상으로 등단한 조평자 시인은 6년 만에 59편의 시를 엮어 첫 시집을 냈다.
시집 제목은 시인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상징이다. '맨드라미'는 유년기 가족사에 얽힌 상처를, '사진관'은 생업의 현장이자 세상과 만나는 창구를 의미한다. 대표작 '맨드라미'에서 시인은 "미결수 아버지가 실형을 떴다는 소문이 돌던 가을", 또래로부터 조롱당한 기억을 "나자빠진 채로 보았던 하염없이 붉은 꽃밭 / 활활 불덩이"로 형상화했다.
현재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인 시인은 배관공, 자퇴생, 베트남 신부 등 이웃들의 서사를 시로 담아냈다. 염선옥 평론가는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응시하면서 공동의 연민과 연대로 확장한다"고 평했다.
해설을 쓴 염선옥 문학평론가는 "사진작가로서 피사체를 오롯이 응시하는 집요한 시선에서 출발해 삶의 진실을 찰나의 빛과 색채로 갈무리한다"며 "안도(眼到)와 심도(心到)의 진중함을 통해 고요한 공감과 예술적 파문을 경험하게 한다"고 평했다.

▲사천문인협회 회장을 지낸 윤덕점 시인이 올해 시집 '크고 뜨거운 손'(북인출판사)을 펴냈다. ⓒ 뉴스사천
윤덕점 '크고 뜨거운 손'
사천문인협회 회장을 지낸 윤덕점 시인은 '크고 뜨거운 손'(북인출판사)을 펴냈다. 1957년 사천 연호리에서 태어난 그는 시집 '마로비벤을 꿈꾸다', '그녀의 배꼽 아래 물푸레나무가 산다' 등을 펴낸 바 있다.
이번 시집 표제시에서 화자는 "어릴 때는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 잘 치겠다는 소릴 자주 들었다"고 회상하지만, 세월이 흘러 "솥뚜껑처럼 두텁고 큰 손등"을 갖게 됐다고 쓴다. 그러나 시인은 과거에 대한 미련 대신 "최고라고 엄지손가락 치켜든 손녀"를 바라보며 현재의 감각을 선택한다.
"그래, 이거면 된다 /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뭐 있겠나 / 피아노, 매니큐어, 희고 가는 손가락, 다 필요 없다 / 힘 다할 때까지 누구든 밥이나 실컷 해먹이자."
백인덕 시인은 해설에서 "윤덕점 시인이 함축한 비의(秘義)는 '밥의 힘'"이라며 "현재의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정동주 선생은 추천사에서 윤 시인의 시 세계를 "잡초와 호미 사이"의 관계로 풀이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시선이라고 평했다.

▲김희주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마음을 천장에 붙이다'(도서출판 곰단지)를 냈다. ⓒ 뉴스사천
김희주 '마음을 천장에 붙이다'
김희주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마음을 천장에 붙이다'(도서출판 곰단지)를 냈다. '맨드리'라는 아호를 쓰는 그는 '옷을 입고 매만진 맵시, 물건의 모양새'라는 순우리말처럼 삶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고 맵시 있는 언어로 빚어냈다.
표제시에서 시인은 "호호 불어 날린 민들레 씨앗보다 / 백만 배 가볍게 떠도는 내 마음을 / 일주일 잠복 끝에 겨우 잡아 / 안방 천장에 꾸-욱 붙였다"고 쓴다. 그러자 "12년 된 야광별 가족이 / 반갑다며 반짝거렸다"고 이어진다.
시집에는 자식이 선택한 길을 묵묵히 응원하는 엄마의 사랑('자율'), 글자를 몰랐던 성인문해교실 수강생이 진심을 담아 건넨 편지('삐뚤삐뚤 편지'), 작은도서관 담벼락을 오르는 담쟁이를 보며 아이들의 꿈을 노래하는 시('근면') 등 일상의 장면이 담겼다.
해설을 쓴 정삼조 시인은 "살아있음을 긍정적이고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우화의 기법으로 드러내고자 한 시집"이라며 "괜히 잘난 척하는 맛이 없고, 독자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시인의 바람이 담겨 있어 쉽고 따뜻하게 읽힌다"고 평했다.

▲교직 생활을 마친 늦깎이 시인 이현숙 작가는 첫 시집 '너는 토마토를 들고 나는 설탕을 준비하고'(문학의 전당)를 펴냈다. ⓒ 뉴스사천
이현숙 '너는 토마토를 들고 나는 설탕을 준비하고'
교직 생활을 마친 늦깎이 시인 이현숙 작가는 첫 시집 '너는 토마토를 들고 나는 설탕을 준비하고'(문학의 전당)를 펴냈다. 2021년 개천예술제 개천문학상 시부문 장원, 지난해 경남작가 신인상 시부문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푸른시 동인에서 활동 중이다.
표제작은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토마토'라는 회문(回文) 구조에 착안해, 단단한 언어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열리는지를 형상화했다. '천천히 붉어지는 중'에서는 방울토마토가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익는다는 건 / 빛을 / 안으로 끌어당기는 일이다"라고 정의한다. 외적 화려함보다 내면의 단단함을 추구하는 시인의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 / 빗소리가 난다"로 시작해 "내 몸에서 빗소리가 마를 때까지 / 나는 쓸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이병국 평론가는 "이현숙 시인은 언어를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에서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 주체로 변화한다"며 "숭고한 파토스로 충만한 시집"이라고 평가했다.

▲사천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는 장미주 시인은 등단 12년 만에 첫 시집 '당신의 보라가 나에게 미친 이유'(도서출판 예맥)를 냈다. ⓒ 뉴스사천
장미주 '당신의 보라가 나에게 미친 이유'
사천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는 장미주 시인은 등단 12년 만에 첫 시집 '당신의 보라가 나에게 미친 이유'(도서출판 예맥)를 냈다. 2013년 시현실로 등단한 그는 현재 사천문인협회와 박재삼문학선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제작에서 시인은 "당신이 없는 동안 / 당신이 없는 동안에만 / 당신은 나의 블루베리였다고" 쓰며 상실과 기억, 애도의 감정을 조용히 담아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닿고 싶었지만 닿을 수 없었다"며 "골목 끝 / 바다가 머지않은 그 설렘으로 / 계절이 바뀐 삶의 온도를 되짚어본다"고 썼다.
강동우 평론가(가톨릭관동대 교수)는 "보라는 빨강과 파랑, 뜨거운 열과 차가운 심연이 한 점에서 만날 때 비로소 이뤄지는 복합적 감정의 농도이자, 상처가 치유로 변할 때 드러나는 재생의 색"이라고 해설했다. 추천사를 쓴 배한봉 시인은 "오랜 침묵을 지나온 만큼 시적 고뇌가 깊었음을 짐작하게 한다"며 "시집 전체가 상실과 치유가 교차하는 감정으로 응집되어 있다"고 평했다.

▲화가 겸 시인 김클소리(본명 金聲泰) 씨는 시 창작 14년 만에 첫 시집 '나는 아직 나를 꺾지 못했다'(경남시인선)를 출간했다. ⓒ 뉴스사천
김클소리 '나는 아직 나를 꺾지 못했다'
화가 겸 시인 김클소리(본명 金聲泰)씨는 시 창작 14년 만에 첫 시집 '나는 아직 나를 꺾지 못했다'(경남시인선)를 출간했다. 2011년부터 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사천문인협회와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문단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내왔다. 시집은 1부 오래된 꽃, 2부 바람의 풍경, 3부 숨구멍, 4부 붉은 지도 등 81편의 시편으로 구성됐다.
시인은 서문에서 "허공에 뿌리 내린 무늬 / 한 그루 나무로 자랐는데 // 너덜한 정신은 / 오랜 세월 뒷걸음만 쳤다 // 중얼거린 혼잣말들 / 참회가 되어 내 겉에 남았다"고 썼다. 진양호 호숫가 '갤러리 길'에서 그림과 시를 써온 그의 작품에는 자연친화적 삶의 철학이 담겼다.
'바람의 시간'에서 시인은 "젊은 남녀가 며칠째 / 골목 쓰레기 더미에서 껴안고 / 환히 웃고 있다"며 버려진 사진 속 연인의 모습을 묘사한다. 해설을 쓴 김준태 전 조선대 교수는 "강렬한 사랑의 풍경은 선생의 시가 높은 휴머니즘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고 평했다. 시인 박종현은 추천사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과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가 스며 있다"고 평했다.

▲제26회 박재삼문학제가 6월 20일과 21일 이틀간 사천시 노산공원 박재삼문학관 일원에서 열렸다. 올해 박재삼문학상은 남길순 시인의 시집 『한밤의 트램펄린』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뉴스사천 자료사진. ⓒ 뉴스사천
대한민국 대표 서정시인 박재삼 고향, 서정의 맥 닿아
사천은 한국 서정시의 거목 박재삼 시인의 고향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으로 대표되는 그의 시 세계는 가난과 상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서정의 힘을 보여줬다.
올해 시집을 펴낸 사천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화려함보다 진솔함, 관념보다 삶의 구체적 장면을 붙드는 태도가 닮았다. 사천의 시인들은 선배 시인의 문학적 유산 위에서 각자의 언어를 빚어가고 있다.
시집 6권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시를 써온 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첫 시집을 내기로 결심한 데는 서로에게 받은 자극이 있었을 터다. 지역 문단이라는 작은 생태계 안에서 함께 읽고 쓰며 성장해온 시간의 축적이 올해 결실로 나타난 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사천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