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은거지, 임실 청웅면 조항치 ⓒ 이완우
임실 청웅면 옥석리 새목치(조항치)에는 1873년에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1827~1898)이 은거한 곳이라고 한다. 그가 이곳에서 동학의 교리를 35일간 전파했다는 내용이 <천도교 임실교사>(최동안, 1981)에 기록되어 전한다.
지난 30일, 임실에 전해오는 해월 최시형의 유적지를 찾아 답사하였다. 새목치 고개를 찾아가는 길목에 3·1운동 민족지도자 33인 중 한 분인 박준승(朴準承, 1866~1927)의 생가터를 지났다. 조항 저수지 옆 도로를 따라가다가, 저수지 위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350m 올라갔다. 겨울의 산기슭은 침묵의 공간이었다. 걷는 발걸음마다 차가운 바람이 반복하여 스며들었다.
1863년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해월 최시형(본명 최형묵)을 동학의 2대 교주로 추대하였다. 해월당(海月堂)이라는 도호를 내렸고 고비원주(高飛遠走)를 당부하며 동학의 미래를 맡겼다.
34년에 이른 해월 선생의 고비원주
1864년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순도한 이후, 해월 선생의 삶은 체포 즉시 처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피하지 않고 이동했고, 침묵하지 않고 포교했다.
34년에 이른 해월 선생의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아 멀리 달아난다)는 단순한 은둔의 시간이 아니었다. 사상을 보존하고, 조직을 축적하며, 역사의 시간을 견뎌낸 장기간의 실천 과정이었다. 34년의 세월 동안 동학은 전국적 신앙 공동체로 뿌리내렸다.
해월 선생의 포교는 공개 설교가 아니라,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윤리적 전수였다. 그는 접과 도소를 중심으로 분산형 조직을 유지했고, 문서, 구전과 의례를 통해 동학 사상을 일상의 언어로 스며들게 했다. 지도자가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작동하는 자율적 구조는 탄압에 강했다. 이 보이지 않는 교단은 훗날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지는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해월 선생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동학이 단순한 비밀 종교가 아니라, 부당한 국가 폭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윤리적·정치적 주체임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신앙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의 정의를 묻는 언어로 확장되었고, 동학은 공공성을 지닌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은거지, 임실 청웅면 조항치 ⓒ 이완우
▲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은거지, 임실 청웅면 조항치
이완우
해월 최시형의 은거지 조항치
조항 저수지를 지나 해월 선생의 은거지로 오르는 길, 겨울 풍경은 바람에 흔들리며 쓸쓸한 느낌이 차갑게 다가왔다. 해월 최시형의 은거지는 억새가 무성한 풀밭이었다. 세상과 거리를 둔 침묵, 차가운 바람에 스미는 결연함, 끝내 꺼지지 않는 신념의 고독이 함께 느껴졌다. 유적지를 혼자 지키고 있는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전북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1137번지는 해월 최시형의 동학 교리 설법 장소이자 은거지로 전해진다.
임실에서의 동학 포교는 1873년 3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장수 교인 김신종과 함께 주치리 새목티 허선의 집에서 35일간 설법하며 시작되었고, 이후 강진면에서 15일간 이어졌다.
또한 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재봉기 이후 해월이 머물며 정세를 주시하던 곳으로, 11월 25일 김제 원평에서 후퇴한 손병희를 만나 12월 초 충청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해월 은거지는 지초봉(570m) 봉우리에서 서북쪽으로 1km 뻗어온 산기슭에 있었다. 지초봉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6km 떨어져서 노산(540m)이 있다. 조선 시대에 해월 은거지에서 지초봉과 노산을 고갯길로 넘어서 오수역참과 장터로 연결되었다. 지도상으로 해월의 은거지에서 오수 장터까지는 큰 고개를 두 번 넘어서 삼십 리(12km)였다. 한나절이면 걸을 수 있는 은밀한 왕래가 가능한 거리였다.

▲임실 오수면 해월암 ⓒ 이완우
이곳 해월 선생 은거지에서 오수역참과 장터 가까이에 있는 해월암(海月庵)이 기자에게 가보아야 할 분명한 목표물이 되어 떠올랐다. 해월 선생 은거지에서 오수 해월암까지는 지도상으로 12km 거리였으나, 자동차로는 임실읍을 경유하여 약 30km의 주행거리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시기, 해월은 전면에 서지 않았다. 그는 봉기의 정당성과 위험을 동시에 인식하며, 혁명의 전개를 주시하는 위치를 택했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판단이었다. 사상의 장기 존속과 조직의 완전 붕괴를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혁명이 패배로 끝난 뒤에도 동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선택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조선 후기의 혹독한 형벌 체계와 밀고 문화 속에서, 34년 동안 내부 고변이 없었다는 점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개인의 카리스마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취였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모범을 보였고, 비폭력을 견지했다. 이는 명령보다 실천, 주장보다 침묵을 택한 해월의 덕성과 관계의 윤리에 기반한 신뢰가 축적된 결과였다.
1894년 동학 혁명 당시에 임실은 임실현(任實縣)이었고, 오수역은 남원부 관문인 북쪽의 역참으로 남원부의 동학교당 본부가 있었다고 일부 지역 기록에 전한다. 조선시대 이전의 이 지역의 역사적 인물이나 사적지가 남원의 읍지인 용성지에 수록되어 있다.
오수역참은 남원부 북쪽 관문으로, 호남과 충청을 잇는 교통·통신의 결절점이었다. 역참과 장터가 결합된 공간에는 관원·상인·보부상·유랑민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정보와 소문, 사상 역시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이동했다.
이러한 환경은 동학과 같은 신앙·사상이 은밀하게 전파되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남원 교룡산 은적암에서 수운 최제우의 사상이 형성·성숙된 뒤, 해월 최시형의 고비원주를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오수는 남원과 각 지역을 잇는 중간 매개지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해월 은거지에서 오수 장터까지 한나절 거리라는 점은, 은거와 접촉이 분리되지 않은 동학 전파의 실상을 보여준다. 지도자가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접주와 신도들이 역로와 장터를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사상을 전수할 수 있는 구조였다.
남원 교룡산 은적암에서 길러진 동학 사상은 오수역참을 거치며 사람의 이동망 속으로 스며들었고, 이 지역은 고비원주 시기 동학이 지역적 신앙을 넘어 전국적 공동체로 확장되는 데 중요한 완충·중계 공간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라산 해월암, 명당과 이름이 남긴 기억
임실 오수면 둔천천 옆의 낮으막한 저라산(猪羅山)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바위 절벽 위의 신포정 정자를 지나서 가파른 길을 300m 올라갔다. 겨울산 소나무 숲길은 비어 있었으나, 오래된 믿음과 인내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했다. 해월암에 도착하였다. 오수면의 시가지가 환히 내려다 보였다.
해월암은 고려 공민왕 1년(1352)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널리 전한다. 두 스님의 법명에서 한 글자씩 따서 '海月庵'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해월암 대웅전은 단청의 색채 속에서도 산중 암자의 절제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임실 오수면 해월암 ⓒ 이완우
요사채는 정면이 길게 열린 장방형 오래된 한옥 건물로, 팔작지붕과 홑처마를 갖춘 소박한 암자형 건축이었다. 화려한 단청을 배제하고 목재와 회벽의 대비로 절제된 미감이 드러났다.
요사채의 '海月庵(해월암)' 글씨는 굵고 힘 있는 필획 속에 과장 없는 균형을 지녔다. 산중의 고요한 기운과 어울려 단정하고 담담하였다. 기자는 요사채에 걸린 '海月庵'의 현판에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도호인 '海月堂(해월당)'을 떠올리며, 산중 암자에 스며든 사상과 수행의 흔적을 조용히 겹쳐 보았다.
이 산자락에 자리한 해월암은 해월 최시형과의 직접적 연관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암자의 이름이 던지는 상징은 동학 신도들에게 심리적 기억의 거점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남긴다.
험준한 산세(해월의 은거지)와 역참이 놓인 교통의 결절점이라는 은거와 이동이 교차하는 공간적 성격은, 해월의 고비원주 경로와도 맞닿아 있는 듯 보였다. 해월 최시형이 지초봉 기슭의 은거지에서 삼십 리 산길을 걸어 이 암자에 도착하여 오수역참을 내려다 보았을 150여 년 전의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이곳 저라산은 풍수적으로 '돼지가 그물에 걸린 형국(猪羅網形)'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모이는 형국은, 탄압 속에서도 민중 속에 뿌리를 내려 조직을 결집시켜야 했던 동학의 운명과 연결되어 읽혔다.
수운 최제우의 순교와 해월 최시형의 고비원주(高飛遠走), 그리고 동학의 성장을 다음과 같은 '雲去月現(운거월현)' 칠언절구 창작 한시로 기자의 생각을 함축해서 표현해 보았다.
水雲去後海月現 (수운거후해월현)
高飛遠走播道天 (고비원주파도천)
一粒靈根生新芽 (일립영근생신아)
終成巨木蓋山川 (종성거목개산천)
수운(최제우)이 지나간 뒤 해월(최시형)이 솟아오르고,
높이 날고 멀리 달려 하늘의 도를 세상에 뿌렸네.
한 알의 신령한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마침내 큰 나무 되어 온 세상을 덮었다.
해월 최시형의 고비원주는 숨어 지낸 시간이 아니라, 사상을 지키고 공동체의 시간을 벌어 준 선택의 연속이었다. 임실 옥석리의 억새밭과 오수 해월암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 사상가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채 어떻게 거리를 조율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이해하였다.

▲임실 오수면 해월암 ⓒ 이완우
이 길 위에서 동학은 은밀하게 이동했고, 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다시 살아났을 것이다. 해월의 은거지를 찾는 이 여정은 결국 한 장소를 확인하는 여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역사와 사상이 어떻게 오늘까지 이어졌는지를 묻는 길이었다. 해월 최시형의 행적을 더듬는 겨울 답사는 몸보다 마음을 먼저 낮추게 하는 역사 문화 탐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