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 시리즈는 2025년 9월 24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진행한 '남북관계 정책방향 전문가 설문조사 기자회견'의 후속으로 기획되었습니다.
남북 합의는 왜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
남북 합의는 한반도 정세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제도적 장치다. 2000년 6·15 선언, 2007년 10·4 선언, 2018년 판문점·평양선언은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 관계 발전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들 합의로 인해,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고, 군사분계선 일대의 총성이 멈추었다. 남북의 합의가 분단의 현실을 바꾸는 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남북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 정세가 흔들릴 때마다 합의도 흔들렸다. '냉엄한 국제 질서', '엄혹한 현실' 앞에서 남북 합의는 취지가 무색하게 뒤집혔다. 반복된 실패 혹은 합의 미실행은 "남북 합의는 왜 지켜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8월 19일부터 9월 1일까지 통일·안보 분야 전문가 4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남북 합의가 지켜지지 않은 문제의 핵심'을 읽을 수 있다. 응답자의 97.8%가 남북 합의의 법제화 필요성을 지지했다. '남북 합의의 법제화 필요성'에 대한 절대적인 찬성은 대북정책·통일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문제와 연결된다.

▲경실련 남북관계 정책방향 전문가 설문조사 기자회견 사진 ⓒ 경실련 통일협회
남북 합의가 무너진 이유는 몇 가지로 볼 수 있다. 북한의 태도 변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남북 합의를 정권 차원의 선택으로 취급하는 국내 정치의 구조, 일관성 없는 통일 정책, 남북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의 부재 등의 복합적인 문제이다. 정권이 바뀌면 합의의 효력과 해석이 달라지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이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합의를 이행하는 문제의 중심에는 '신뢰'가 있다. 공자는 "믿음이 사라지면 정치가 설 수 없다"고 했다. 남북 합의 문제는 합의 내용보다 중요한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기반과 수행력의 문제였다. 군사적 긴장과 이념 대립이 반복될 때마다 신뢰의 토대는 얇아졌고, 실제 이행의 기반도 함께 약해졌다.
설문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73.3%)'는 응답이 높은 비율로 나타난 것은 이 구조적 불신을 반영한다. 비핵화를 전제로 한 합의는 이미 현실과 어긋나 있으며, 전문가들은 협상의 중심축을 '북미 협의(35.6%)'로 지목했다. 한국이 한반도의 직접 당사자임에도 결정적 국면에서는 주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다시 확인된 것이다.
남북합의가 이행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상반된 정책 신호다. 한쪽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사적 신뢰 구축을 약속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대규모 한미연합 군사 훈련을 강화하거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미루어 왔다. 설문에서 연합군사훈련의 축소·조정 필요가 '91.1%', '전작권 전환의 현 정권 내 추진이 71.1%'로 나왔다. 이러한 결과는 남북 합의를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이 취약하거나 합의의 신뢰성을 훼손했음을 보여준다. 합의가 종이 위에 적혀 있을 뿐, 실제 정책은 그 합의와 충돌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북이 합의한 사항을 추진할 제도적 기반은 마련하지 못하였다. 판문점선언과 9·19 군사합의는 실제로 군사적 충돌을 줄이고 비무장지대의 안정성을 강화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법적 기반이 취약했기에 정권이 바뀌면 이전으로 돌아갔다. 전문가들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비율로 법제화를 요구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합의가 선언에 머물러서는 지속적인 평화를 만들 수 없다.
냉철히 남북 합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북 합의는 지켜지지 않아서 실패한 것인지, 현실적이지 않게 설계되었기에 실패한 것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쉬운 일에서 시작하여 어려운 일로 나아가는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새로운 합의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기존 합의가 흔들리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는 일이다.
신뢰 회복, 모순된 정책 신호의 정리, 법제화는 그 시작이다. 평화는 선언에서 태어나지만, 제도와 일관성 속에서만 지속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약속'이 아니라 약속을 지켜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남북 합의를 지켜내는 생태계를 구축하고, 건강한 통일환경을 조성하고, 통일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