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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시니어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에서 있던 일을 연재하고 있어요.
시니어 글쓰기 수업은 오전 10시에 시작한다. 수강생 대부분이 오전 9시 50분쯤 도착하신다. 일찍 오셔서 커피를 드시거나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신다.

Y님은 결석하신 적은 없지만 제시간에 오신 적도 없다. 매번 10시 20분쯤 교실 문을 여신다. 처음엔 병원 진료나 집안일 때문에 늦으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몇 주가 지나도 상황은 똑같았다. 20분이라는 시간까지 일정했다.

어느 날 나는 Y님께 아침에 나오기 힘드신지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그러다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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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일찍 오면 먼저 온 사람들이랑 인사해야 하잖아요. 그게 좀 부담스러워서요."

나는 멈칫했다. Y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나이 들면 인사 한 번 하는 것도 에너지가 들어요. 말 주고 받는 게 피곤할 때가 있거든요. 근데 먼저 와 있으면 다음에 오는 사람들한테 계속 인사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늦게 와요. 슬그머니 들어와서 제 자리에 앉으면 편해요."

예의를 지키려는 피곤함

 시니어 수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솔직한 전략.
시니어 수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솔직한 전략. ⓒ oceanng on Unsplash

Y님은 예의를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커서 늦으신 거였다. 일찍 오면 인사를 해야 하고, 인사를 하면 대화가 이어지고, 대화를 하면 에너지가 소진되는 걸 Y님은 알고 계셨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와 있어야 성실한 사람이고, 정시에 도착하면 간신히 예의를 지킨 사람처럼 취급 받는다. 늦는 건 무례하고,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배웠다. 일찍 와서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태도처럼 평가받는다.

Y님의 고백은 그런 통념을 뒤흔들었다. Y님에게 늦는 행동은 무례가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너무 예의 바르려고 애쓰다 지쳐서, 차라리 늦게 오는 쪽을 택하신 거였다. 달라서 당황스럽고, 달라서 미안했다.

70대가 넘으면 사교에 쓸 체력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 체력을 수업 시작 전이 아니라 수업 중에 쓰고 싶다는 마음은 시니어 수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솔직한 전략이었다.

정시가 아닌 정성

늦는 것보다 더 큰 실례가 있을 수도 있다.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거나 진심 없이 안부를 묻는 것이 더 실례일 수 있다. 물론 그게 사회생활이고 그정도도 안 하고 어떻게 사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회적인 나'를 유지하느라 정작 본론을 할 기운이 남지 않는다면 Y님의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 Y님은 매주 글을 써오시는 성실한 수강생이기도 했다. 아낀 에너지로 본인에게 더 중요하다고 믿는 일을 하고 계셨다.

다음 주 수업날, Y님은 역시 오전 10시 20분에 오셨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제자리에 앉으셨다. 그때 다른 어르신 한 분이 Y님을 보고 빙긋 웃으며 고개만 까딱 하셨다. Y님도 고개로 답례하셨다. 말은 없었다. 에너지 소모도 없었다. 하지만 인사는 오갔다. 늦게 오는 것도 관계를 만드는 한 방식이었다. Y님은 자기만의 속도로 이 강의실에 충분히 스며들고 있었다.

신기한 일은 그 뒤에 생겼다. 몇 주 뒤, Y님이 10시 15분에 오셨다. 다음 주엔 10시 10분. 그다음 주엔 10시 정각.

"선생님, 이제 좀 괜찮아요. 늦게 와도 된다니까 오히려 일찍 오고 싶더라고요."

Y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허락받으니 부담이 사라진 거였다. 늦어도 된다는 말이 오히려 정시에 오게 만들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몸이 느끼는 시간은 다르다. 10시는 누구에게나 10시지만, 어떤 이에게는 아직 9시 같고 어떤 이에게는 벌써 11시 같다. 나이 들수록 그 간격은 커진다. Y님은 세상의 시계가 아닌 당신의 시계로 살고 계셨다. 시간은 시계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는 것을 새삼 배운 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sns에도 실립니다.


#내인생풀면책한권#복지관글쓰기#시니어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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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풀면 책 한 권(내풀책)

글과 음악을 짓는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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