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이곳은 대한민국 경제 지형도를 바꿀 거대한 변화의 진원지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공사가 한창인 이곳은, 덤프트럭 행렬과 흙먼지가 뒤덮인 거대한 공사판이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산이 깎이고 길이 새로 뚫리는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위태롭게, 그러나 묵직하게 숨 쉬고 있다.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딸 복온공주(福溫公主)와 남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 그리고 구한말 우국지사 김석진(金奭鎭) 열사가 잠든 안동 김씨 묘역이다.

▲복온공주 김병주 묘소(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산99-1) ⓒ 용인시민신문
2025년 마지막 달에 반도체 도시로 비상하는 용인의 화려한 청사진 뒤편에서, 잊혀져 가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공주의 시간'과 '선비 정신'을 추적해 보았다.
요절한 왕녀, 꽃피우지 못한 15년 생애
복온공주(1818~1832). 그녀의 삶은 조선 왕실의 영광과 비애를 동시에 보여주는 짧은 드라마였다.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 차녀로 태어난 그녀는 1824년(순조 24년) 6세의 나이에 공주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실록(순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그녀는 왕실의 귀한 딸로서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녀의 오빠이자 비운의 천재 문장가로 불리는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는 누이동생을 각별히 아꼈다. 효명세자가 남긴 문집 <경헌집(敬軒集)>에 수록된 '삼매연림(三妹連林)'이라는 글에서 그는 복온공주(福溫公主)를 두고 "품성이 번화하고 기골이 풍영하여 마치 물속의 연꽃과 같다(氣骨豊盈 如水中蓮)"고 묘사했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성격이 밝았던 생기 넘치는 10대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1830년(순조 30년), 13세가 된 공주는 안동김씨 가문의 김병주(金炳疇)와 혼인했다. 김병주는 당시 세도 정치의 핵심 가문 출신으로 창녕위(昌寧尉)에 봉해졌다. 당시 왕실의 혼례는 국가 대사였다. 그러나 이 화려한 결합은 비극으로 끝났다. 혼인 2년 만인 1832년 5월, 공주는 15세의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그녀의 죽음을 두고 왕과 왕비가 깊은 슬픔에 빠졌음을 전하고 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슬픔, 그것은 왕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녀 죽음 이후 남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는 재혼하지 않고 헌종, 철종, 고종 3대를 거치며 왕실의 어른으로 살다 1887년 세상을 떠나 공주의 곁에 묻혔다.

▲복온공주 김병주 묘비 ⓒ 용인시민신문
BTS RM(김남준)이 되살린 '활옷'의 기억, 그리고 문화유산
요절한 공주의 삶은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에 들어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통해 다시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복온공주(福溫公主)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단연 '활옷'이다. 활옷은 조선 시대 공주와 옹주, 그리고 사대부 여인들이 혼례 때 입던 예복으로, 붉은 비단 위에 화려한 자수가 놓인 것이 특징이다. 복온공주(福溫公主)의 활옷은 현존하는 활옷 중 제작 시기와 착용자가 명확한 몇 안 되는 유물로, 조선 후기 왕실 자수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활옷이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계기는 2023년, 세계적인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김남준)의 기부였다. RM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기부금을 전달하며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을 당부했다. 그 결실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 시대 활옷이 국내로 들어와 보존 처리를 마치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전시를 통해 공개된 활옷에는 '이성지합(二性之合) 백복지원(百福之源) 수여산(壽如山) 부여복(富如福)'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수 놓여 있었다. "두 성(남녀)이 합하여 백 가지 복의 근원이 되니, 수명은 산과 같고 부귀는 복과 같이 하라"는 뜻이다. 15세에 요절할 줄 꿈에도 모른 채, 백년해로와 부귀영화를 기원하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을 왕실 장인들과 그것을 입었을 어린 공주의 마음을 생각하면 애잔함이 더한다.
또한 공주는 뛰어난 문예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한글 시 7편과 한문 시 3편은 엄격한 유교 사회 속에서도 왕실 여성이 향유했던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공주의 혼인은 '삼해주(三亥酒)'라는 전통주의 비법이 안동김씨 가문에 전수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궁중에서만 빚던 귀한 술이 사대부가로 전해져 오늘날 서울시 무형문화유산으로 이어지게 된 배경에는 복온공주(福溫公主)의 혼인이 있었다.
서울 '공주골'에서 용인 '죽능리'까지, 이장의 역사

▲복온공주 글씨첩(국립한글박물관) ⓒ 용인시민신문
복온공주(福溫公主) 묘소가 용인에 자리 잡게 된 과정은 한국 근현대사의 도시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원래 공주와 창녕위의 묘소는 현재 서울 강북구 번동, '북서울 꿈의 숲' 자리에 있었다.
오랜 기간 그곳은 주민들에게 '공주골'이라 불렸다. 지명이 될 만큼 공주 묘소는 지역의 상징이었다. 묘소 옆에 있던 재실인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유산 제40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공원 내에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서울의 팽창과 공원 조성 사업 등의 이유로 이장이 불가피해졌다. 결국 2002년, 안동김씨 문중은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에 위치한 선영으로 공주와 부마의 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묘지 이동'이 아니었다. 죽능리 묘역 입구 비석에 새겨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선영을 한곳으로 모아 명릉으로 삼는다"는 문구는 문중이 흩어진 조상들을 한 곳에 모아 관리하려는 현실적 필요성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가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맞물린 결과임을 시사한다. 서울 개발에 밀려난 왕실의 유적은 용인 산자락에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용인 원삼면 역시 반도체라는 거대 한 개발의 파도 앞에 서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왕실의 영광과 구국(救國)의 혼이 공존하는 공간

▲복온공주 홍장삼(국립고궁박물관 국가민속문화유산) ⓒ 용인시민신문
용인 죽능리 안동김씨 묘역이 가진 진정한 무게감은 단순히 왕실의 사위(부마)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이곳에는 화려했던 세도 가문의 영광 뒤로 무너져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구한말 대쪽 같은 선비, 우국지사 김석진(金奭鎭, 1843~1910) 열사가 함께 잠들어 있다.
김석진(金奭鎭)은 복온공주(福溫公主)의 남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의 손자다. 즉, 복온공주(福溫公主)는 그에게 할머니뻘이 되는 왕실의 어른이다. 그는 조선 말기 판돈녕부사 등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나, 삶의 궤적은 형인 김홍집(친일 내각 수반)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위정척사 사상을 견지하며 외세의 침탈에 끝까지 저항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고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남작(男爵) 작위를 수여하려 하자,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라는 통탄과 함께 작위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해 9월, 끝내 아편을 삼키고 순국했다. 왕실의 인척이자 최고위직 관료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걷어차고, 죽음으로써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과 절개를 지킨 것이다. 정부는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따라서 이 묘역은 단순히 조선 왕실의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독립운동의 성지이기도 하다. 비록 묘소의 물리적 위치가 가장 높은 곳은 아닐지라도, 그가 보여준 정신적 높이는 그 어떤 왕족보다 높고 푸르다.
한 공간 안에 '왕실의 사랑과 문예(복온공주)'와 '나라를 잃은 슬픔과 저항(김석진)'이 함께 서려 있다는 점은 이곳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반도체 클러스터 개발로 주변이 급변하는 지금, 우리는 이 묘역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이 묘역은 단순한 가족묘지가 아니라, 왕실의 역사와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가 한 공간에 공존하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또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가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당해낸 선조들의 치열했던 정신일 것이다.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 원삼면의 미래를 묻다
현재 원삼면 일대는 지도 자체가 바뀌고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은 용인을 세계적인 반도체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국가적 비전 아래 진행되고 있다. 경제적 파급 효과와 일자리 창출 등 '미래의 먹거리'를 위한 개발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네비게이션으로도 찾을 수 없어 동네 주민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찾을 수 있는 복온공주(福溫公主) 묘역의 현실은 우리 사회가 문화유산을 대하는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개발 구역에 직접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대규모 공사로 인한 주변 환경의 변화와 접근성 단절은 문화유산을 '고립된 섬'으로 만들 위험이 크다.

▲애국지사 김석진묘 안내문 ⓒ 용인시민신문
산업 발전이 뿌리 없는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첨단 산업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백 년 된 유적을 도시의 심장으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용인의 반도체 클러스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장만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서려 있는 이야기와 역사를 존중하는 '문화적 설계'가 동반되어야 한다.
복온공주(福溫公主) 묘역과 김석진(金奭鎭) 열사의 묘소는 원삼면이 단순히 '반도체 공장 부지'가 아니라, 조선 왕실의 마지막 숨결과 독립운동의 결기가 서린 '역사의 땅'임을 증명하는 증거물이다.
제안한다. 용인시와 개발 주체는 이 묘역을 포함한 지역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이를 반도체 단지 내 역사문화 공원이나 탐방로와 연계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복온공주(福溫公主)와 김석진(金奭鎭) 열사의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 하나, 그곳으로 향하는 길 하나를 정비하는 것이야말로 'K-반도체'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다.
개발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기억을 지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15세에 요절한 공주의 슬픈 사연과 나라를 잃은 슬픔에 목숨을 끊은 열사의 비장함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는 굴착기 옆에서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 용인시민신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이 글을 쓴 이재근씨는 용인문화원 문화해설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