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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유이 장편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주인공은 티백에 적힌 출처 불명의 명언을 쫓아 독일 바이마르까지 날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텍스트가 아닌 진짜 삶을 마주하게 된다.
스즈키 유이 장편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주인공은 티백에 적힌 출처 불명의 명언을 쫓아 독일 바이마르까지 날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텍스트가 아닌 진짜 삶을 마주하게 된다. ⓒ 리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명언을 소비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타임라인에는 아름다운 배경 사진 위에 얹혀진 니체, 쇼펜하우어, 그리고 괴테의 문장들이 넘쳐난다. 그 문장이 주는 위로에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우리는 정작 그 문장이 진짜 그들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그럴싸하게 꾸며낸 말인지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 문장 뒤에 붙은 위대한 이름이 주는 '권위'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 권위의 무게에 짓눌려 평생을 바친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고작 100원짜리 홍차 티백 꼬리표에 적힌 문장 하나가 그의 30년 학문적 성과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2025년 제172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을 넘어 한국 독자들에게까지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스즈키 유이의 장편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이지수 옮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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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 '히로바 도이치'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다. 그는 세상의 모든 지혜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서 나왔다고 믿으며, 자신의 삶 또한 괴테의 격조에 맞춰 설계해 온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결혼 25주년 기념일 아침, 비극 아닌 비극이 찾아온다. 아내가 무심코 우려낸 홍차 티백의 태그(Tag)에서 낯선 문장을 발견한 것이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 J. W. v. Goethe

도이치 교수는 혼란에 빠진다. 평생 괴테의 전집을 외우다시피 연구해 온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이런 문장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테가 이런 헐거운 문장을 썼을 리 없어." 그는 처음엔 부정하지만, 곧이어 불안감이 엄습한다. '혹시 내가 놓친 미발굴 원고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것이 진짜라면 나의 권위는 어떻게 되는가?'

소설은 이 사소하고도 엉뚱한 의문에서 시작해, 도이치 교수가 문장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독일 바이마르로 떠나는 일종의 지적 추리극 형식을 띤다. 하지만 그 여정은 엄숙한 학문적 탐구라기보다는, 꽉 막힌 중년 남성이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우스꽝스럽고도 짠한 소동극에 가깝다.

저자 스즈키 유이는 2001년생이라는 젊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능수능란한 필치로 '권위주의'를 풍자한다. 소설 속 사람들은 문장의 내용보다 그 문장을 누가 말했느냐에 더 집착한다.

"괴테가 말했다"라고 하면 평범한 말도 진리가 되고, 무명 작가가 말했다고 하면 훌륭한 통찰도 묻혀버리는 세태. 작가는 도이치 교수의 집착을 통해 우리가 맹신하는 '전문가'나 '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꼬집는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도이치 교수가 독일에 도착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그는 도서관과 박물관을 뒤지며 '진짜 괴테'를 찾으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현지 사람들은 괴테의 명언 따위는 모른 채 그저 오늘 하루의 햇살과 맥주, 그리고 사랑에 충실하며 살아간다. 텍스트 속에 갇힌 죽은 지식과, 거리에서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삶의 대비. 이 책이 던지는 첫 번째 묵직한 질문이다.

왜 지금 우리는 '괴테'를 호출하는가

2025년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장편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표지.
2025년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스즈키 유이 장편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표지. ⓒ 리프

하지만 이 소설을 단순한 지적 풍자물로만 읽는다면 오산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추천사에서 "나는 이렇게 적어본다. 오에 겐자부로, 히라노 게이치로, 그리고 스즈키 유이라고"라며 극찬한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소설의 진짜 주제는 '가족'과 '소통'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도이치 교수는 괴테의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25년을 함께 산 아내의 외로움과 성인이 된 딸의 고민은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 그가 가짜 명언을 쫓아 헤매는 동안, 독자들은 그가 놓치고 있던 '진짜 삶'의 파편들을 목격하게 된다.

티백의 문장이 진짜 괴테의 말이냐 아니냐는 결말에 가서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소동을 통해 도이치 교수가 비로소 책에서 눈을 떼고, 앞에 앉은 사람의 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말했다"는 괴테조차도, 지금 내 앞에 있는 가족의 마음까지 대신 말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언어와 나의 체온으로만 전해질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묻는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위인들의 입을 빌려 말하고 싶어 할까. 그것은 아마도 불확실한 시대를 건너는 우리에게 확실한 '정답'을 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스즈키 유이는 말한다. 정답은 바이마르의 도서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마시는 찻잔 속에, 그리고 퇴근길 가족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 섞여(mix) 있다고.

이 책은 '이동진의 파이아키아'가 선정한 이달의 책으로 꼽히며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입증받았다. 지적인 허영심을 유쾌하게 꼬집으면서도,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 소설은, 바쁜 일상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우리네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과도 같다.

주말 오후, 스마트폰 속 명언들은 잠시 꺼두고 이 책을 펼쳐보자. 어쩌면 당신도 당신만의 '티백 문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출처가 괴테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의 삶을 울렸다면, 그것은 이미 위대한 문장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고양시 덕양구에서 주민자치회 및 학교 운영위원회 활동을 하며, 마을과 교육의 행복한 동행을 꿈꾸는 시민기자입니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은이), 이지수 (옮긴이), 리프(2025)


#스즈키유이#괴테는모든것을말했다#아쿠타가와상#일본소설#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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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사회 곳곳을 누비며 마을과 학교, 사람을 잇는 활동가이자 기록가입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믿음으로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대변하고, 지역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꿈꾸며 글을 씁니다. 책상 앞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이웃과 함께 호흡하며 우리 동네의 진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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