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처럼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버려지는 것들'의 목록 앞에 섰다. 효율과 공간이라는 물리적 논리에 밀려난 폐기 도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소임을 다한 '종이 뭉치'였겠지만, 내 눈에는 보물창고와 다름없었다.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본격적인 보물찾기에 나섰다. 주섬주섬 가방에 담은 예닐곱 권 책 중, 전남진 시인이 쓴 일대기 <천상병>(2007년 7월)이 묵직하게 손에 잡혔다. 집으로 돌아와 먼지를 털어내고 펼친 그 책은, 내가 알고 있던 '귀천'의 시인 그 이상의 생애를 품고 있었다. 보물찾기하듯 건져 올린 시인의 삶을 서평의 문장으로 다시 세워본다.
시인과의 만남

▲책표지 ⓒ 작은씨앗
작가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살 때였다.어머니는 책에 빠져 사는 상병이 늘 걱정이었다. 책을 읽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또래 아이들에 비해 체구도 작고 건강도 좋지 않는데, 책만 읽느라 더 약골이 되지 않을까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 밤늦도록 불이 켜진 상병의 방을 보며 한숨을 쉬는 일이 늘어났다. 이후 어머니는 상병의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책을 태우게 된다.
어머니의 걱정과 염려에도 상병의 독서는 멈출 줄을 몰랐다. 집보다 도서관에 먼저 들렀다가 어스름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병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부엌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71쪽)
자신을 가르치는 교사이면서 친구의 매형인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로 알려진 시인이었다. 선생과의 만남은 상병에게 찾아온 새로운 세계였다. 김춘수 선생은 시집을 얻기 위해 늦은 저녁에 찾아온 상병을 내심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시집을 건네 받은 상병은 품에 넣고 온 시집을 꺼냈다. 표지 속에는 단정한 필체로 쓰인 짧은 글귀가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네가 그것에 닿아야만 내 것이 될 수 있다. - 김춘수"
겨울방학 동안 상병은 선생의 집과 서점을 밥 먹 듯 드나들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시집을 구해 읽었다. 선생의 말을 이해하려면 시를 많이 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124쪽)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속에서 가장 빛나는 가치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남긴 진짜 유산이 아닐까?
흔히 천상병을 '귀천'의 시인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가 밥보다 막걸리를 사랑했던 소탈한 애주가였으며, 인사동 거리를 천진난만하게 누비던 이 시대 마지막 순수 시인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막걸리와 순수, 그리고 살아 돌아온 유고시집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경이로운 대목은 그의 '유고시집' 이야기이다. 행방불명되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시인을 기리며 지인들이 펴낸 유고시집 <새>, 하지만 시인은 고문 후유증을 견디며 살아 돌아왔고, 자신의 유고시집을 직접 읽는 기이하고도 슬픈 장면을 연출했다. 세상의 모진 풍파를 다 겪으면서도 끝까지 '순수'를 놓지 않았던 그의 삶이 페이지마다 절절히 박혀 있었다.
병석에 누워서도 상병은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들은 그런 상병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은 상병을 살아 유고 시집을 낸 유일무이한 시인으로 만들었다.(205쪽)
책을 읽으며 다시금 <귀천>을 낭독해 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가난, 병마, 시대의 폭력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이었음에도 그는 왜 이 세상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불렀을까? 이 책 속의 천상병은 욕심을 덜어낸 마음, 어린아이 같은 영혼만이 세상을 끝내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음을 자신의 생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폐기될 뻔한 한 권의 책을 통해, 나는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삶의 태도를 다시 배우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쓸모없음' 으로 분류되었던 이 책은 이제 내 서재의 가장 귀한 자리를 차지했다. 오래되고 낡았다는 이유로 밀려났을 뿐, 그 안에는 한 시대를 위로한 시인의 영혼이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팍팍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언젠가 삶의 끝자락에서 "참 좋은 소풍이었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도서관 폐기 더미 속에서 발견한 이 보물 같은 책을, 나는 아마 끝내 버리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시인이 평생 지켜낸 가장 단단한 쓸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