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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사무실의 정적을 깨는 짧은 진동. 올 것이 왔다. 은행 앱 알림 팝업에 뜬 네 글자 '급여 입금'.

​한 달 동안 상사의 핀잔을 견디고, 야근 식대로 때운 뱃살을 얻어가며, 아침마다 천근만근인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대가다. 숫자를 확인한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스마트폰이 발작하듯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카드 대금 출금", "전세 대출 이자 출금", "통신비 자동이체", "관리비 납부".

조금 과장하면 하이패스도 이보다는 느릴 것이다. 내 월급은 내 통장을 '정거장' 쯤으로 여기는 게 분명하다. 잠시 머무르지도 않고, 빛의 속도로 카드사와 은행으로 흩어진다. 오후 2시, 다시 열어본 은행 앱에는 처참한 잔고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이것을 돈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만져보지도 못한, 그저 화면 속 숫자 데이터. 그래, 이것은 '사이버 머니'다.

'성실함'은 죄가 없다

 Stock photo of the Business Man with a credit card by rupixen
Stock photo of the Business Man with a credit card by rupixen ⓒ rupixen on Unsplash

허무해진 마음을 달래려 습관처럼 부동산 앱을 켠다. 이것은 직장인에게 일종의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내가 출근길 버스 창밖으로 매일 올려다보는 그 아파트. '살고 싶다'가 아니라 '갖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는 그 콘크리트 덩어리의 가격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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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가 12억 원.'

​순간 뇌 기능이 정지한다.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통장에 남은 쥐꼬리만 한 잔고 말고, 내가 숨만 쉬고 한 푼도 안 쓰고 월급을 고스란히 모은다고 가정해보자. 1년에 3천만 원을 모은다고 쳐도 10년이면 3억, 40년이면 12억이다. 내가 칠순 잔치를 할 때쯤이면 저 집 현관문 열쇠를 쥘 수 있을까. 아, 물가 상승률을 깜빡했다. 40년 뒤 저 집은 아마 30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결론은 명확하다. 내 월급으로 저 집을 사는 건, 이번 생에는 불가능한 미션이다. ​이 명백한 숫자 앞에서 많은 청년 직장인들은 '자책'이라는 늪에 빠진다.

'내가 더 노오력을 안 해서 그래', '남들 코인 할 때 나는 뭐 했나', '월급쟁이로 사는 내가 바보지'.

​하지만 나는 오늘 이 글을 통해 감히 말하고 싶다. 나의 텅 빈 통장은 실패가 아니라고. 뼈 빠지게 일해서 버는 '노동 소득'의 속도가, 자고 나면 오르는 '자산 소득'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건 나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시스템의 기울어진 운동장 탓이라고.

그런데도 나를 비롯한 우리는 그 책임을 온전히 자신에게로 돌리며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 12억짜리 아파트가 없다고 해서,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만원 지하철에 오르는 성실함마저 헐값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

​어떤 동료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샀다가 금리 폭탄을 맞아 허덕이고, 어떤 동료는 집 사기를 포기하고 외제차를 샀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서, 전세 대출 이자가 오르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겁쟁이 세입자로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잘못' 산 사람은 없다. 각자의 방식대로 이 거친 파도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삶은 계속된다
 부동산앱을 껐다.
부동산앱을 껐다. ⓒ 오마이뉴스

월급은 스쳐 지나가고, 집값은 저 하늘의 별이다. 이토록 명백한 '패배'가 예정된 게임판 위에서, 나는 왜 오늘도 출근하는가.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세게 온 점심시간,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고르며 깨달았다. 거창한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출근한다고.

​10억짜리 아파트는 못 사더라도, 내 힘으로 번 돈으로 오늘 저녁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자유. 은퇴 후의 안락한 삶은 보장 못 하더라도, 당장 내 삶을 지탱하는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을 내 몫으로 감당해 내는 책임감. 이것은 비루한 정신 승리가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하게 내 삶을 책임지려는 숭고한 투쟁이다.

​부동산 앱을 종료했다. 12억이라는 숫자가 주는 절망감에 짓눌리기엔, 오후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고, 퇴근 후 나를 기다리는 맥주 한 잔이 너무 소중하다.

​비록 내 통장은 하이패스 차로처럼 뻥 뚫려버렸지만, 그 대가로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손 벌리지 않고 하루를 살아냈다. '택도 없는' 월급이라 욕하면서도,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좀비처럼 일어나 출근할 나 자신을 응원한다. 집은 없어도, 성실하게 오늘을 채워간 하루는 그 어떤 아파트보다 견고하다.

#월급#집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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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 (leto09) 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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