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 전문가이자 일본통으로 불리는 강창일 전 주일대사가 해방 이후 80년에 걸친 양국 관계의 흐름을 역사학자의 예리한 시선과 외교 현장의 생생한 경험으로 엮은 <한·일 관계 80년사 : 강창일 전 주일대사가 본 한·일 관계의 통찰과 해법>을 펴냈다. 이 책은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부터 윤석열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전개된 한일 관계의 전모를 정권별로 정리한 교양 역사서이자, 실천적 외교 비평서다.
저자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의 해인 지난해부터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다.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반복돼 온 갈등과 불신의 구조를 성찰하고,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관계 설정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이 출발점이다. 강 전 대사는 한일 관계를 단순한 외교 현안의 집합이 아닌, 국내 정치와 국제 질서, 지도자의 선택이 중층적으로 맞물린 역사적 과정으로 분석한다. 강 전 대사는 최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문제 의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일 관계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계가 출렁이는 이유를 역사 속에서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과거를 덮자는 것도, 과거에만 머물자는 것도 아닌, 미래로 가기 위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강 전 대사는 도쿄대학에서 일본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자, 4선 국회의원과 주일본대사를 지낸 외교 현장 경험자다. 유신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이후 제주 4.3 연구를 이끌었으며, 한일 관계와 일본 정치·외교를 평생의 연구 주제로 삼아왔다. 학문과 정치, 외교 현장을 두루 경험한 그의 이력은 이 책에 담긴 분석과 제언에 현실성과 무게를 더한다.
책은 이승만 정권기 해방과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 문제에서부터 박정희 정권기의 국교 정상화와 경제개발, 전두환·노태우 시기의 군사 정권과 일본 보수정권의 유착을 차례로 다룬다. 이어 김영삼 정부의 문민정부 출범과 일본 진보정권기의 비교, 김대중 정부의 '용서와 포용'에 기초한 새로운 한일 관계 모색, 노무현 정부 시기의 셔틀외교와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조망한다.
또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아베 정권의 반한 정책과 한국 외교의 진폭, 문재인 정부의 원칙론과 일본 보수정치의 충돌, 윤석열 정부 들어 나타난 한일 관계의 '비정상화'와 '이념 외교'까지 최근의 논쟁적 국면도 비중 있게 분석한다. 저자는 각 시기마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 권력이 어떤 이해관계 속에서 상대국을 인식했는지 짚으며, 정권 교체에 따라 급변해 온 한일 관계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기자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한일 관계를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라는 도덕적 판단이나 이념적 진영 논리로 단순화하지 않는 태도다. 강 전 대사는 한국 정부의 외교적 오류와 일본 보수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동시에 비판하며, 책임을 어느 한쪽에만 전가 하지 않는다. 특히 박정희 정부의 국교 정상화, 김대중 정부의 화해 전략,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를 각각 당대의 국제 질서와 국내 정치 계산 속에서 분석하는 대목은 기존의 평가와는 다른 입체적 시각을 제공한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외교 현장의 생생함이다. 주일대사로 재임하며 일본 정치인, 관료, 언론인들과 직접 부딪혔던 경험은 외교 문서나 이론서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현실의 맥락을 전달한다. 일본 정치가 왜 특정 국면에서 급격히 우경화되는지, 한국의 대일 외교가 왜 국내 정치에 따라 과도하게 흔들리는지에 대한 설명은 추상적 분석을 넘어 구체적 경험에서 나온다.
강 전 대사는 한일 관계가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의 필요에 따라 완전한 적대에서 일방적 추종, 혹은 상호 호혜적 협력과 격렬한 갈등을 오가며 극단적으로 흔들려 왔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변동성은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 간에 안정적인 협력 구조를 정착시키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정권의 유불리에 따라 관계가 출렁이는 구조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에 저자는 한·일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는 국가와 국민, 정부와 사람을 분리해 바라보는 시각이다. 감정적 반일을 넘어 일본을 정확히 이해하는 이성적 지일(知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역사 문제와 경제·안보 협력을 분리해 접근하는 전략적 사고다.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요구를 유지하되, 이를 이유로 모든 협력의 가능성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 제언이다.
강 전 대사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한일은 싸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 서로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지일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한일 협정 60주년, 해방 80년을 넘어 100년을 향해 가는 지금, <한·일 관계 80년사>는 역사적 성찰과 현실적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미래의 한일 관계를 설계해야 하는지 차분히 묻는다.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성찰하게 하는 하나의 기준점으로서 이 책은 충분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한·일 관계 80년사최근 강창일 전 주일대사가 출간한 ‘한·일 관계 80년사’ 표지 ⓒ 강창일 전 주일대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