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민석 국무총리가 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행정통합 인센티브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행정통합 인센티브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대전-충남, 광주-전남 등에서 불붙은 '행정통합' 논의를 두고 정치권은 지역의 이해관계를 돌파하는 '대통령의 결단'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다.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보자. 이것이 결단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 정치권이 행정통합 외에 더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인 '기능적 협력'의 가치를 미처 포착하지 못한 데서 오는 착시 때문이다.

유럽연합(EU) 사례를 통해 지역 격차와 초광역 행정 수요에 대한 선진국의 해법을 살펴보면, 현재 대한민국 행정통합 논의가 왜 무모한 도박인지 명확히 드러난다. 그들은 지도를 새로 그리는 '경직된 울타리 치기(hard space)'에 매몰되지 않았다. 대신 기존의 울타리는 단단히 지키되, 필요에 따라 언제든 대문을 열고 손잡을 수 있는 '유연한 협력 지대(soft space)'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들은 왜 두 지역을 하나로 합치지 않았을까?

AD
첫째, 기존 행정 구역이 가진 '지역 민주주의'의 가치 때문이다. 주민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자치권과 유대감은 행정 편의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 깊은 두 나무를 억지로 합치려다 둘 다 죽이기보다, 각자의 뿌리는 지키되 가지를 서로 엮어 거대한 숲을 만드는 것이 훨씬 생명력 있는 선택임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 '수정 가능성' 때문이다. 행정 체계를 하나로 합치는 순간 관리 조직은 비대해지고 변화에 둔감해진다. 무엇보다 한번 합치면 되돌릴 방법이 없는 '비가역적 위험'이 크다. 반면 기존 울타리를 유지하며 필요한 일에만 손을 잡으면 문제에 따라 최적의 파트너와 유연하게 일할 수 있고, 효과가 없으면 큰 비용 없이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거대한 실험이 오직 '정치권의 시계'에 맞춰 속도전으로 치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진영이 두드리는 정치적 계산기는 지역 발전보다 '정치적 이벤트'에 치중해 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을 무모한 제도 실험을 정치적 시간표에 맞춰 밀어붙이는 것은 주민의 미래를 담보로 한 도박이다. 이러한 정치적 도박을 멈추기 위해서는 단순히 '통합 아니면 방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중앙정부의 역할 자체를 재정립해야 한다.

유럽의 '적극적 보충성' 원칙은 국가가 지역 발전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어 지표와 예산을 지원하면서 현장에서 같이 뛰어주는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또한 지자체 간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는 중앙정부가 강력한 중재자로서 개입할 수 있다는 '위계의 그림자'를 드리워 지역들이 스스로 협력의 장에 나오도록 유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EU가 증명한 '유연한 협력 지대'의 한국형 모델인 '충청광역연합'이라는 대안을 갖고 있다. 이 지능적인 실험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적극적 보충성의 원리를 제도에 충분히 녹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별지방자치단체가 실효를 거두려면 구속력 있는 공동의 결정권과 공동재원을 위한 자치재정권을 확립하고, 중앙정부와의 협약 및 협력 성과에 따른 보상 체계를 통해 위계의 그림자를 실질화해야 한다.

행정통합은 한 번 엎지르면 주워 담을 수 없는 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를 다시 그리는 독단적 펜이 아니라, 자기 결정권의 민주주의라는 뿌리를 지키며 지역을 잇는 정교한 협력의 설계도다.

#대전충남#행정통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곽현근 (hkkwak) 내방

대전대 행정학과에 재직 중으로 지방자치, 주민참여, 사회적자본 등을 연구해왔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