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북구 서변숲도서관에서 마련한 '저자와의 대화'가 지난 17일 10시부터 12시까지 열렸다. 초대된 저자는 <어쨌든 즐겁게 살겠습니다>의 손수진 작가였다. 행사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즐겁게 살겠습니다' 앞에 '어쨌든'을 왜 붙였을까 의아하게 여겼다.

▲'어쨌든 즐겁게 살겠습니다' 겉표지 ⓒ 컨텐츠조우
저자와의 대화는 어릴 때부터 친구인 김해경 번역가의 작가 소개, 1부 저자 강연, 2부 질의 응답 순서로 진행되었다. 1부 저자 강연은 다시 전반부 '국제 구호 활동'과 후반부 '치매 엄마 간병'으로 크게 나뉘었다. '어쨌든'이 '즐겁게 살겠습니다' 를 수식한 데 대한 궁금증은 1부가 끝날 때쯤 풀렸다.
"이른바 안정된 직장이라고 말하는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12년 이상 아프리카와 동남아에서 국제 구호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치매를 앓게 된 엄마를 돌보기 위해 귀국했고, 약 7년 반이 지나갔습니다. 우리나라로 돌아온 처음에는 제 삶이 허망해졌다는 생각에 빠져 한참 우울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내 앞에는, 이제 막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어느덧 여든을 넘긴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보냈던 지난 세월과 예수에게 걸었던 마지막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현실 앞에서 통곡했던 베드로처럼, 지난 12년간 해외에서 쏟아부은 열정과 헌신은 허탈감으로 되돌아왔고, 나는 날마다 통곡을 했습니다."
작가의 말을 들으면서 '충분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활발하게 활동 중이고 사회적 성취도 눈앞에 놓인 50세 안팎 나이에 모든 것을 중단하고 집에 갇혀 지내야 하는 상황과 마주쳤을 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회의에 빠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각성이 곧 왔습니다. 12년 동안은 아프가니스탄, 케냐, 차드, 캄보디아 사람들을 구호했고, 귀국 뒤로는 엄마를 구호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다다랐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다고나 할까요."
결론에 해당하는 작가의 말을 듣는 순간, 강의실 벽에 게시되어 있는 행사 현수막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이해되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생- 국제구호 활동에서 엄마 간병으로 인생의 깊이를 더하다"라는 현수막 속 '인생의 깊이를 더하다'라는 표현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20대에 이미 은연중 드러났던 작가의 미래
작가가 외국 여러 나라에서 국제 구호 활동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20대 때 무용담(?)이 이미 말해주는 듯했다. 경북 의성에서 사회복지담당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이야기다. 술에 취하면 사무실로 찾아와 의자를 던지며 행패 부리는 수급자 아저씨와 맞짱을 뜨기도 했다.
그는 거구였다. 작가의 표현으로는 "맞으면 뼈도 못 추릴" 아저씨였다. 그런데 "쪼그만" 아가씨가 "겁대가리 없이" 대들자 그도 감당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 날 이후 그 아저씨는 작가 앞에서만은 "온순해졌다"고 한다.
작가는 그보다 더한 일화도 소개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줌마가 빈집에서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의감에 불탄" 작가는 갓난아기를 들쳐 업고 그녀의 시댁으로 쳐들어가서 시어머니와 "대판" 싸웠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쫓아낸 바람에, 아줌마가 인근 폐가에서 두 딸과 함께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항의했다.
작가의 회고는 본인의 품성을 말해주는 듯하다. 작가는 "그날 집으로 돌아간 아기는 지금 성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따스하고 그리운 날들이었습니다"라고 돌이켜본다. 그런 일들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니 자연스레 아프리카와 동남아까지 가게 되었을 것이다. 또 엄마 간병을 국제구호의 연장선으로 믿으며 즐겁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강연이 끝나고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나이가 많은 참여자 중에는 치매 예방법을 묻기도 했고, 누군가는 감자 농사 조합을 결성해 유엔에 납품한 아프리카 성공 사례에 거듭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다 기록하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동영상 촬영 중인 관계자를 보며 저으기 마음을 놓았다. 저자와의 대화를 다시 들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