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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오호홍, 우리가 그랬다는 거지?"
올해로 독서 모임의 막내까지 모두 나이 앞에 '6'자를 달았다. 아무리 출발이 좋은 모임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10년을 넘기기 힘들다는데, 우리는 벌써 14년째다. 모임의 시작은 퇴근 후 가까운 천변을 걷다가 우연히 이루어졌다.
어느 날부터 저녁 산책 길에 자주 마주치게 되어 함께 걷게 된 여자 다섯 명. 슬슬 정이 붙자 밥이나 한번 먹자고 했고, 그 자리에서 한 달에 한 번 독서 모임을 해보자는 이야기로 발전했다. '꽃잎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독서 모임은 서로의 이름을 넣어 'OO 꽃잎'이라 부르며 매달 한 번 씩 책 꽃을 피웠다. 그 사이 나는 귀촌을 했고, 한 명이 개인 사정으로 빠졌으며, 세 명이 은퇴를 했다.

▲꽃잎인연이여, 영원하라!꼬냑 한 모금 입에 머물고 본격적인 독서모임이 시작되었다 ⓒ 유상신
2박3일, 독서모임 여행
유일한 현직 교사인 막내 꽃잎이 방학을 맞아 지난 11일부터 13일까지 함께 2박 3일로 부안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독서 모임을 겸한 여행이었다. 구체적인 일정은 따로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 2박 3일이 얼마나 알차고 충만할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모두 설레는 마음이었다.
출발 당일, 전국에 눈 예보가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 눈이 많이 내려 출발 시간이 오후 1시로 늦춰졌다. 부안에도 당연히 눈이 와있을 거라 여기며 안전을 위해 곧장 숙소를 향했다. 다른 때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벌써 몇 군데를 다녀오고도 오후 일정이 남아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김제를 지나 부안에 이르도록 눈이 내린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한나절을 그냥 흘려보내나' 살짝 아쉬워질 즈음, 여행 고수 K꽃잎이 방향을 틀었다.

▲석정의 방신석정 문학관 내에 있으며 신석정 시인의 집필모습을 볼 수 있다. ⓒ 유상신
"부안읍에 신석정 문학관이 있는데, 들렀다 갈까요?"
두말하면 잔소리다. 우리는 그냥 지나칠 뻔한 신석정문학관에서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바짝 대고, 새삼 진지한 눈빛으로 꼼꼼히 챙겨 들었다. 우리의 반짝이는 눈빛에 해설사의 설명도 덩달아 윤기가 돌았다. 배웅하던 해설사가 가까운 곳에 이매창 공원이 있다며 들러보라고 권했고, 그 말에 네 꽃잎들은 더욱 신이 났다.
방문객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고 퇴근할 뻔했던 매창 테마관의 해설사는 우리를 반기며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배움의 열기에 마음이 한껏 달아오른 채 다시 숙소로 향하던 길, 우연히 들른 두 곳이 그날 저녁 이야기 나눌 책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이매창 테마관부안 읍 이매창 공원 내에 있으며 가까운 곳에 이매창 묘가 있다 ⓒ 유상신
변산 해변에 위치한 숙소에서 맨 밥에 배추 된장 쌈과 김치만으로도 최고의 만찬을 즐길 줄 아는 네 꽃잎들. 슬슬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책을 꺼내 둘러앉았다. K꽃잎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사 왔다는 코냑을 꺼냈다. 네 꽃잎들은 뜨거움을 입안에 머금고, 곧장 책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이날 함께 이야기 나눈 책은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은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이었다.
독서 토론에서 이야기 나눌 질문들은 단체대화방에 미리 올려져 있었다. '이끔이'의 진행에 따라 네 꽃잎의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때로는 확장된 이야기 따라 샛길로 들어섰다가 돌아 나오고, 엉켜 풀리지 않는 대목은 서로 궁리하여 풀어가며 변산의 밤이 깊어갔다. 밖은 마치 책 서두의 강렬했던 설경을 재현하듯 한 발, 두 발 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채석강 해안절벽수만권의 책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은 모습의 퇴적암 층리를 관찰할 수 있다 ⓒ 유상신
다음 이야기를 기약하는 즐거움
이튿날, 느긋하게 아침 식사와 모닝 커피를 즐긴 우리는 부안의 대표 지질 명소인 격포 채석강을 찾았다. 국가유산포털 자료에 따르면, 채석강은 변산 반도 격포항에서 닭이봉 일대를 포함한 1.5km의 층암 절벽과 바다를 말한다. 강이 아니라 해안 절벽이다.
자연이 빚은 퇴적 예술의 걸작 앞에서 네 꽃잎의 입은 저절로 벌어졌다. 내친김에 닭이봉 정상의 팔각정 전망대에 있는 부안 지질 공원 전시관도 들렀다. 지난밤의 치열한 학구열을 식힐 겸 격포항의 두 개 등대 길을 가볍게 걸은 후, 오후에는 궁항 해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쉬었다.

▲닭이봉 전망대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가 기가 막히다. 2층에 지질 전시관이 있다 ⓒ 유상신
그날 밤, 또 다시 탐구열에 불이 붙었다.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다가 중학교 때 아버지 서재에서 우연히 집어 들고 단숨에 읽었던 김내성의 대하 소설 <청춘 극장>이 떠올랐다는 Y꽃잎의 말이 불씨였다. 모두들 그 책을 궁금해 했다. 궁금증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검색을 해보니 원작을 바탕으로 한 1975년 변장호 감독의 영화가 있었다. 휴대폰과 TV를 연결하느라 한참을 고생한 끝에 기어코 보고야 말았다.
이어서 K꽃잎의 코냑이 다시 등장했고, 우리는 닭이봉 지질 전시관에서 하나씩 챙겨 온 팸플릿을 펼쳤다. 본격적인 '팸플릿 부안 지질 탐사'가 시작된 것이다. 팸플릿에는 부안 지질의 형성 과정과 다양한 지질 용어 설명, 그리고 지질 명소가 소개되어 있었다. 다들 노안에 접어든 눈으로 깨알 같은 글씨를 서로 돌아가며 읽어내고, 모르는 것은 또 묻고 찾아보느라 그날 밤도 하마터면 하얗게 지새울 뻔했다.

▲지질 전시관에 비치된 팜플렛부안의 지질환경, 지질관련 용어, 부안지질명소들이 소개되어 있다 ⓒ 유상신

▲부안 청자박물관전북 부안지역은 고려중기 상감청자 생산의 메카.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에 개관한 청자박물관은 우리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려청자(상감청자)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고 있다 ⓒ 유상신
여행 마지막 날 일정은 전나무 숲 길이 아름다운 내소사를 거쳐 전날 밤 팸플릿 지질 공부로 알게 된 굴 바위와 선계 폭포(지질 명소)를 가보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반계사당과 청자 박물관은 덤으로 따라 붙었다.
앞서 지나 온 이틀을 떠올려보면 마지막 여정이 어떠했을지는 긴 설명이 없어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들리는 소문에 어느 꽃잎은 저녁 8시,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줌으로 진행된 '브런치 작가 북 토크'에 바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 모든 여정을, 나이 앞에 6자를 단 우리들이 해냈다는 말이다. 이것이 14년 차 독서 모임의 저력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책을 매개로 배우고, 걷고, 웃으며, 또 다음 이야기를 기약하는 즐거움. 내가 아직도 웃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지질명소 굴바위부안 우동리에 위치한 숨겨진 명소다. 한번 가보면 입이 쩌억 벌어질 것이다. ⓒ 유상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독서모임 이름인 꽃잎인연은 도종환 시인의 '꽃잎인연'이라는 시제목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