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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3 11:21최종 업데이트 26.01.23 11:21

삼한의 최대 연맹체 마한, 그 중심은 어디였을까

[마한은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서 끝났는가 2]

ⓒ 완도신문

마한은 오래도록 백제 이전의 역사 정도로만 취급돼 왔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과 문헌 연구 성과는 익산을 중심으로 한 마한 사회가 한반도 고유한 정치·경제·문화 체계를 갖춘 독자적 문화권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4세기 후반까지, 약 700년에 걸쳐 지속된 마한은 삼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연맹체였고, 훗날 백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정치적·문화적 토양이 될 수 있었다.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으로 구성된 정치 집단 연맹체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무렵 한반도 중남부 지역을 지배했다고 여겼으나, 최근 가야역사문화권 사업이 진행돼 세계유산등재 이후, 마한역사문화권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굴된 유적들에 의해 그보다 훨씬 폭넓은 연대를 품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을 거느린 최대 세력이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전체 호수는 10여만 호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한반도 사회로서는 압도적인 규모의 세력이었다.

마한은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 그리고 호남 전역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특히 익산은 금강 하구와 내륙 교통의 요충지이자 비옥한 평야 지대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익산을 마한 연맹의 중심 세력지이며, 나아가 진왕이 자리했던 목지국(目支國) 의 유력한 비정지로 보는 견해가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진왕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 완전한 국가 이전 단계의 정치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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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철저한 연맹체로 구성된 왕국이었다. 54개 소국의 대표자는 목지국의 진왕(辰王)이었지만, <삼국지>에 "진왕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고 기록된 것처럼 절대 군주적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마한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직전 단계의 정치체였음을 뜻한다. 각 소국의 자율성이 강했고, 연맹체적 성격이 뚜렷했다.

이 같은 구조는 마한 사회의 토착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중국 군현과 같은 외래 지배 체제가 아니라,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진 한반도 남부의 토착세력이 자연스럽게 성장해 형성된 정치체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익산이었다는 점은 고고학적 유물 분포에서 뚜렷하게 확인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세형동검, 청동거울, 의기화 된 청동기, 초기 철기류가 풍부하게 출토된다. 이는 마한 초기부터 이 지역이 정치적 중심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익산 신동리 유적에서 발견된 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함께 철기 유물이 공존하는 양상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 문화로 이행하는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마한 사회의 기반은 농업이었다. 익산을 포함한 금강 유역과 호남평야는 조·보리·콩·밀 등 밭작물은 물론 벼농사에도 적합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기후는 온화했고 토양은 비옥했다. 5월 파종과 10월 수확기에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농업이 마한 사회의 핵심 경제 기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사 때는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졌다. 탁무(鐸舞)와 비슷한 춤을 추며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다는 기록은 마한 사회가 농경의례와 집단 신앙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문화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철기 농기구의 보급으로 돌칼과 돌낫이 사라지고 쇠로 만든 손칼과 낫, 따비와 괭이, U자형 삽날을 나무 자루에 끼운 가래, 철제 삽 등이 등장하면서 농업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생존 경제에서 잉여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잉여 생산은 곧 정치권력과 사회 분화를 만들었다.

익산이 마한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같은 농업 생산력과 철기 문화의 결합이 있었다. 마한은 철기 농업 문명의 결정체였던 셈이다.

고조선 준왕 남천설과 무덤이 말하는 권력

익산이 마한 중심지로 부상한 배경에는 고조선 준왕의 남천(南遷) 기록과의 연관성도 거론된다.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하한 이후, 기존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면서 정치적 중심축이 익산 일대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신동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청동기와 철기의 공존 양상, 그리고 함평 초포리, 화순 대곡리, 장수 남양리 등 호남 내 주요 마한 유적과의 문화적 동질성은 익산이 마한 전체를 이끄는 정치 세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무덤은 단순한 장례 공간만이 아니었다. 무덤은 권력과 사회 구조를 나타내며, 이는 곧 정치 체제의 실체를 의미한다. 특히 문헌 기록이 제한적인 마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고분은 가장 확실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익산 지역에 남아 있는 마한 고분은 이곳이 단순한 소국이 아니라, 마한 정치 질서의 중심 공간이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익산 마한 문화는 조기(기원전 3세기기원전 1세기), 전기(기원 전후3세기), 중기(3세기4세기 전반), 후기(4세기 전반5세기 후반)이다. 이 변화의 흐름은 마한이 성장하면서 변모하고, 마침내 백제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 완도신문

먼저 조기는 익산이 마한의 정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다. 이 단계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다송리, 용제리, 평장리, 신동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세형동검, 청동거울, 의기화된 청동기와 함께 주조철부를 비롯한 철기 유물이 공존한다.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사용되던 과도기적 상황이 확인되는 것이다.

특히 신동리 유적의 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철기 유물이 함께 출토됐다. 이는 단순한 생활 유적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층의 묘제였음을 의미한다. 청동 무기는 여전히 권위의 상징이었고, 철기는 실질적 생산력과 군사력을 상징했다. 두 체계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익산이 기술과 권력의 전환을 주도한 중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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