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산업 전환이 본격화된 2026년 한국을 앞두고, 기후정책 싱크탱크 녹색전환연구소는 일본 사례를 통해 전환금융과 지역 에너지 전환의 조건을 살폈다.

▲도쿄타워에서 바라본 일본 도쿄의 전경. 고층 주거·업무 건물이 넓게 펼쳐진 대도시 경관이 보인다. ⓒ 녹색전환연구소
최근 한국 산업계와 정책 입안자 사이에서 일본의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X, Green Transformation)' 추진전략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GX 추진전략은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경제 구조와 사회 시스템 전반을 녹색전환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본의 경우 민관이 10년에 걸쳐 150조 엔(약 1400조 원) 규모를 투자한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이에 일본 정부는 20조 엔(약 186조 원) 규모의 GX 경제이행채(국채) 발행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의 사례는 규제보다 인센티브를 앞세우고, 정부의 마중물 역할을 통해 민간 투자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벤치마킹 대상으로 거론된다. 일부 국내 산업계는 이러한 일본 사례를 근거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나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의 완화, 기후에너지환경부(기후부)의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Taxonomy)보다 폭넓은 기준을 적용하는 '전환금융'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정부는 '대한민국 녹색대전환(K-GX) 추진단'을 출범해 산업·경제 구조를 탈탄소 성장지향형으로 전환하는 '대한민국 K-GX 추진전략'을 올해 안에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녹색전환연구소가 일본 정책 당국과 금융기관, 기업, 학계 전문가 등과 다방면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결과, 일본은 자국 산업구조와 에너지안보라는 특수한 여건 속에서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GX 추진전략을 시행하는 측면이 있어 보였다.
일본이 겪고 있는 시행착오와 고민을 대한민국의 녹색전환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기준' 없는 녹색전환의 위험성

▲일본 도쿄 시부야 스크램블 횡단보도 교차로를 오가는 행인들의 모습. ⓒ Luca Sartoni, Flickr
한국 산업계는 녹색금융 적용에서 유럽연합(EU)의 엄격한 택소노미(Taxonomy) 대신, 일본의 산업 특성을 고려한 유연한 로드맵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쉽게 말해 무엇이 친환경인지 판단하는 택소노미의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투자가 더딘 상황이니, 당장은 친환경으로 분류되지 않더라도 녹색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 투자에 대해서는 유연한 기준을 적용해 금융의 역할을 확대하자는 취지다.
일본은 산업별 기술 로드맵을 기반으로 한 접근법을 택했다. 이를 통해 시장의 유연성을 보장하고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는 명분이 있다.
그러나 일본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이것이 가져올 부작용 역시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저명한 한 전문가는 연구소에 "일본의 이러한 접근이 명확한 정의의 부재로 이어져, 이른바 '고스트 트랜지션(Ghost Transition)'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진정한 녹색전환인지에 대한 과학적이고 통일된 기준이 없다 보니, 화석연료 수명을 단순히 연장하는 기술에도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의 주요 발전사업자들은 정부의 기술 로드맵에 따라 암모니아 혼소나 탄소포집·활용·저장(CCUS)에 기술개발과 투자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암모니아 혼소는 기존 석탄·가스 발전을 유지한 채 연료 일부를 대체하는 방식이고, CCUS 또한 화석연료 사용을 전제로 배출을 사후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다.
두 기술 모두 국제적 기준에서 화석연료 기반 시스템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으며, 투자자 관점에서도 '그린워싱' 우려를 불러 일으킨다.
'녹색전환'을 둘러싼 산업계의 생각

▲일본 도쿄만 인근에 LNG 선박이 입항 중이다. ⓒ Donald MacLeod, Flickr
일본의 GX 추진전략이 액화천연가스(LNG) 발전과 같은 화석연료 기반 인프라를 '고착화(Carbon Lock-in)'할 위험이 있다는 우려는 이미 국제적으로 널리 제기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비용효율적인 온실가스 감축수단으로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온실가스 배출이 오히려 늘어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 유력 발전사업자 관계자 역시 인터뷰에서 이런 부작용을 인정했다. 관계자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로 인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과 에너지안보의 측면에서 LNG를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을 근거로 들었다.
한국은 과연 이런 우려로부터 자유로울까? 지난해 경북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에 '아시아 퍼시픽 LNG 커넥트' 세션이 열렸다.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인공지능(AI) 확산으로 필요한 막대한 에너지의 해법은 LNG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LNG는 더 이상 브릿지 연료가 아니라 풍력·태양광·원자력과 함께하는 파트너 연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거대한 화석연료 투자 설비가 좌초자산으로 전락할 가능성에 대해 기업과 금융 부문이 이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GX 추진전략이 필요한 이유가 기존 기성 이익의 보호와 투자자 확보를 위한 규제의 완화가 필요해서인가? 아니면 기후대응을 위한 산업의 전환이 필요해서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부터 분명해야 한다.
일본 GX 투자 '150조 엔', 숫자는 있으나...

▲일본 가와사키 임해공단의 야간 산업 전경. 이 공단에는 대형 정유·석유화학 공장들이 대거 밀집해 있다. ⓒ Marcus, Flickr
앞서 일본 정부는 향후 10년간 민관 합산 150조 엔 규모의 GX 투자를 이끌어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문제는 이것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산업의 탈탄소와 녹색산업 확장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느냐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재정 부담의 책임을 상당 수준 배출자들에게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 GX 추진전략은 불명확한 부분이 많았다. 우선 '150조 엔'이란 수치에 대한 근거다. 연구소와의 인터뷰에서 주요 당국자는 일본 정부가 투자 대상과 전략 산업을 설정했음에도, 필요 재원에 대한 추산은 탈탄소와 경제성장을 고려한 거시적 판단에 가까웠다고 밝혔다. 상세한 기초 데이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본 정부는 20조 엔 규모의 GX 경제이행채를 발행해 국가 주도로 재원을 투입하고 나머지 130조 엔(약 1200조 원)은 민간에서 조달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아직 신중해 보인다.
일본의 한 주요 금융 관계자는 한국의 녹색금융 시장처럼 일본 채권 시장에서도 '그리니엄(Greenium, 녹색채권 금리 혜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거나 미미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또 시장 측면에서 GX 추진전략에 따른 투자 동기 역시 현재로서는 부재하다고 평했다.
물론 국채를 적극 활용하는 GX의 재정전략은 과감한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채권 상환을 불확실한 미래 배출자의 부담(추후 시행될 탄소부과금과 배출권거래제)으로 떠넘기는 방식에는 우려가 뒤따른다. 이는 현재 배출자에게 책임을 유예하는 논거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산업경쟁력 저하와 같은 주장은 동일하게 미래 배출자의 부담을 면책하기 위한 논리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일본 정부의 재원 접근법은 고탄소 업종의 이해를 보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세대 간 불평등이 정책 추진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일본에서 한국 향해 날아온 조언

▲도쿄타워에서 바라본 도쿄 스카이트리와 주변 주요 고층 건물 전경. ⓒ 녹색전환연구소
일본 정부는 전통적으로 탄소가격제에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탄소세가 있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며, 한국이 시행 10년을 맞은 배출권거래제도, 일본은 2026년에야 본격적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연구소가 만난 한 정책 연구자는 일본이 탄소가격제를 제때 도입하지 못하고 보조금 정책에만 의존하는 현 상황에 대해, 글로벌 경쟁력 확보 측면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오히려 아세안(ASEAN) 국가들이나 중국조차 자체적인 택소노미를 구축하며 투명성을 강화하는 추세가 언급됐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택소노미가 없는 일본의 방식이 국제 표준에서 뒤쳐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즉, 택소노미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면 택소노미에 해당하는 경제활동을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산업정책 수단과 시장 규제 환경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안부터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배출권 가격은 유럽연합(EU) 배출권 시장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화석연료 보조금까지 얹어주는 경제 환경에서 기업들과 경제 주체들은 감축 설비나 기술, 에너지 효율화 투자를 우선순위에 둘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런 영역을 방기한 채 수십조 원의 정부 자금을 투입한다고 해서 시장이 움직이고 산업의 탈탄소가 가능하다고 믿기 어렵다. 일본의 GX 추진전략 사례는 택소노미와 탄소가격이 녹색금융과 산업전환의 장벽이 된다는 점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당 제도의 정상화가 시장 활성화의 핵심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규제 지체' 현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춰진 제도를 어떻게 하면 실질적인 산업 전환의 동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최기원 경제전환팀장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