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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AW2026 특집]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섭식장애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나 미적 기준의 영향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감정, 신체, 관계, 사회 구조, 의료 체계, 기술 환경이 서로 깊게 얽힌 정치적·물질적·제도적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논의는 오랫동안 개인 책임, 가족 문제, 혹은 의학적 진단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는 이러한 협소한 틀을 넘어, 세계 각지의 연구자·활동가·정책 전문가·당사자 연구자들이 경험과 지식으로 구축해온 더 넓은 정치적 지평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현장에서 일하지만 섭식장애를 이해하고 돌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법, 젠더, 노동, 디지털 기술, 불평등, 거버넌스, 당사자 경험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이 시리즈는 그들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해 전하며, 한국의 독자 — 특히 당사자, 활동가, 정책 입안자, 연구자 — 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기획·글: 박지니 (작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활동가)

계기는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팟캐스트였다. 1형 당뇨병 환자와 가족이 가장 시급하게 여기는 연구 질문을 '제임스 린드 얼라이언스(James Lind Alliance, JLA)' 방식으로 도출하는 과정을 다룬 방송이었다. 게스트 중 한 명은 네덜란드의 섭식장애 임상가이자 연구자인 에릭 판 푸르트(Eric van Furth) 교수였다. 섭식장애 전문가가 왜 당뇨병 연구 우선순위 논의에 등장했을까. 답은 단순했다. 그는 이미 10여 년 전, 섭식장애 분야에서 JLA 방법을 처음으로 실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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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푸르트 교수는 1990년대부터 네덜란드에서 섭식장애 치료와 연구를 병행해 온 베테랑이다. 인터뷰를 요청하며 한국의 현실(공공 치료 체계, 국가 차원의 연구 인프라, 환자 주도의 연구 의제 설정 구조가 전혀 부재한 상황)을 전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연구는 적어도 환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문제의식은 보건의료 연구가 실제로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에 대한 구조적 성찰이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그 질문 자체를 던질 공적 토대가 없다. 섭식장애를 연구의 대상으로 전제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제도적·정책적 구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JLS 로고 (위), INVOLV podcast의 한 에피소드 썸네일 (아래). 환자, 돌봄 제공자, 의료 전문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 우선순위를 공동으로 설정하는 JLA 방법론을 소개하는 팟캐스트에서, 에릭 판 푸르트는 네덜란드 섭식장애 분야에서 JLA 우선순위 설정을 이끈 전문가로서 현재 제1형 당뇨병 커뮤니티에서 같은 방법을 적용 중인 정책 담당자이자 당사자 헬레인 크노트네러스(Heleen Knottnerus)와 게스트로 참여했다.
JLS 로고 (위), INVOLV podcast의 한 에피소드 썸네일 (아래).환자, 돌봄 제공자, 의료 전문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 우선순위를 공동으로 설정하는 JLA 방법론을 소개하는 팟캐스트에서, 에릭 판 푸르트는 네덜란드 섭식장애 분야에서 JLA 우선순위 설정을 이끈 전문가로서 현재 제1형 당뇨병 커뮤니티에서 같은 방법을 적용 중인 정책 담당자이자 당사자 헬레인 크노트네러스(Heleen Knottnerus)와 게스트로 참여했다. ⓒ INVOLV

제임스 린드 얼라이언스(JLA) "수행되는 연구의 80%가 환자에게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다룬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거버넌스 실험

JLA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의료 연구의 상당 부분이 연구자 내부의 관심사에 치우쳐 실제 환자와 가족의 필요와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에서 시작됐다. JLA는 직접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은 아니다. 연구가 시작되기 전 단계에서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다시 묻는 일을 돕는 곳이다. 이를 위해 환자, 가족, 임상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미해결 질문을 수집·정제하는 '우선순위 설정 파트너십(Priority Setting Partnership, PSP)'이라는 엄격한 절차를 운영한다.

영국에서 JLA는 국립보건연구소(NIHR)의 전폭적인 제도적 지원 아래 운영된다. PSP를 통해 도출된 'Top 10' 연구 우선순위는 NIHR의 연구 과제 공모 가이드라인에 명시적으로 반영되며, 이는 곧 국가 연구비 배분으로 직결된다. 다시 말해 연구 우선순위 설정은 상징적 참여 절차에 그치지 않고, 실제 예산 집행을 좌우하는 정책 장치로 기능한다.

반면 2015년 착수된 네덜란드의 섭식장애 PSP는 이러한 국가 차원의 제도적 설계 없이 출발했다. 에릭 판 푸르트는 오로지 스스로의 문제의식에서 개인 연구자 자격으로 네덜란드 정신건강기금(MIND Fonds Psychische Gezondheid)의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의 물꼬를 텄다. 이 점은 이후 진행된 캐나다(2018)와 호주(2020)의 섭식장애 PSP와도 대비를 이룬다. 캐나다에서는 국립보건연구소(CIHR)의 재정 지원 아래 PSP가 수행됐고, 호주 역시 인사이드아웃 섭식장애 연구소(InsideOut Institute)가 국가적 자원과 인프라를 동원해 JLA 방식을 조직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섭식장애 PSP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당사자 단체의 협력을 통해 900개가 넘는 질문을 수집했고, 그중 상당수는 실제 환자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PSP의 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보여주기식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미 근거가 충분한 질문은 냉정하게 제외됐고, 최종 우선순위 설정 워크숍 단계에서는 연구자와 임상가의 발언권이 엄격히 제한됐다. 판 푸르트 교수는 웃으며 말했다.

"그 단계에서는 저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습니다."

JLA 원칙의 핵심은 모두의 목소리를 듣는 데 있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규정함으로써, 지식의 권력 균형을 재배치하는 데 있다.

그 결과 도출된 '섭식장애 연구 우선순위 톱10'은 화려한 최신 기술이나 유전학이 빠진 목록으로 추려졌다. 대신 회복까지 걸리는 시간, 완전한 회복의 가능성, 치료 환경의 차이, 가족의 역할, 치료 관계의 질 같은 질문들이 중심을 이뤘다. 이는 학술적 보수성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우리가 가진 지식을 ARFID나 거식증 같은 복잡한 임상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 묻는, 당사자들의 절박한 요구사항이었다.

Featback 홍보 이미지 (위), Proud2Bme 팟캐스트 중 한 에피소드의 썸네일. Proud2Bme는 섭식장애 경험자와 가족을 위한 네덜란드의 온라인 커뮤니티이자 디지털 돌봄 생태계다. 4명의 에디터와 약 30명의 자원활동가가 모든 게시글과 대화를 상시 중재하며, 자동화보다 인간의 판단을 우선한다. 온건한 중재를 원칙으로 하되, 당사자와 가족을 분리한 구조 속에서 신뢰와 책임을 유지한다. 공적 보조금으로 운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Featback 홍보 이미지 (위), Proud2Bme 팟캐스트 중 한 에피소드의 썸네일.Proud2Bme는 섭식장애 경험자와 가족을 위한 네덜란드의 온라인 커뮤니티이자 디지털 돌봄 생태계다. 4명의 에디터와 약 30명의 자원활동가가 모든 게시글과 대화를 상시 중재하며, 자동화보다 인간의 판단을 우선한다. 온건한 중재를 원칙으로 하되, 당사자와 가족을 분리한 구조 속에서 신뢰와 책임을 유지한다. 공적 보조금으로 운영되며, 소셜미디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 Proud2Bme

JLA 프로젝트를 떠받친 신뢰의 인프라: 당사자 커뮤니티 Proud2Bme

인터뷰 후반, 나는 디지털 헬스와 AI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캐나다와 호주에서는 같은 JLA 방식이 더 기술 중심적인 연구 의제를 도출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신중했다.

"예측이라는 측면에서 AI가 지금 단계에서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AI는 우리가 측정한 것만 볼 수 있고, 측정하지 않은 것은 학습할 수 없다. 상관관계는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이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네덜란드에는 디지털 도구가 존재한다. 에릭 판 푸르트가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출신의 동료와 함께 2009년 구축한 플랫폼 Proud2Bme는 섭식장애 경험자와 가족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로, 수십 명의 중재자와 자원활동가가 모든 게시글과 대화를 상시 관리한다. 익명성은 보장하되 방임하지 않는 운영 원칙은, 이곳을 단순한 플랫폼이 아니라 '관리되는 돌봄 인프라'로 만든다.

또한 Proud2Bme 생태계 안에서 개발된 '구조화된 자기 도움(guided self-help)' 프로그램 Featback은 본격적인 의료 개입 이전에 발생하는 '치료 공백'을 체계적으로 메운다. 이는 치료를 대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당사자가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조기에 다음 단계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수행한다.

참여를 연출하는 정책이 아니라, 구조를 시험하는 책임

인터뷰를 조율하며 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에릭 판 푸르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 생각에 임상의가 하는 일의 약 80%는 자신이 속한 의료 시스템에 의해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섭식장애 치료와 연구가 제도, 재정, 거버넌스라는 구조적 틀에 얼마나 강력하게 예속되어 있는지를 짚어낸 진단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섭식장애 PSP가 보여준 것은 '더 나은 임상가'나 '더 진보적인 연구자'의 탄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이 생성되고, 걸러지고, 살아남고, 예산과 연결되는 경로 전체가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조적 실험이었다.

이 실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신뢰가 축적된 당사자 커뮤니티,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 그리고 전문가의 독점적 발언권을 제한하는 엄격한 절차였다. 결국 임상의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그의 윤리 의식 이전에 시스템이 허용하는 경계 안에서 결정된다. 섭식장애의 돌봄과 연구를 둘러싼 정치는 의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질문이 어디에서 발생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결정하는 '인프라 설계'의 문제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바로 그 인프라가 공고할 때에만 비로소 '환자의 언어'가 비로소 연구와 정책의 공용어로 번역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이 글은 약 1만 4천 자 분량의 원고를 축약한 버전입니다. 전체 글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원문에 포함된 주요 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임스 린드 얼라이언스(JLA)
○ 네덜란드 섭식장애 연구 우선순위 설정 프로젝트 (2015-2016)
○ 보여주기식 참여를 거부하는 PSP의 엄격한 거버넌스
○ 네덜란드 섭식장애 PSP가 드러낸 질문들: 회복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 디지털 헬스와 AI: 가능성보다 한계가 먼저 드러나는 지점
○ Proud2Bme: '참여'를 가능하게 만든 전제 조건
○ 런던 국제 섭식장애 컨퍼런스와 ARFID
○ 네덜란드의 현재: 정신질환, 고통, 안락사의 문제

▶ 전체 글 보기: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lt-7gt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섭식장애#잠수함토끼콜렉티브#제임스린드얼라이언스#JLA#ERICVANFU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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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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