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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첫눈이 소복이 쌓였다. 동심으로 돌아간다. ⓒ 이지현
첫눈이 왔다. 3일 연속 영하 10도의 강추위와 함께.
'내가 첫눈'이라고 존재감만 보여주고 떠난 첫 눈은 있었지만 장독대 위에, 나무 위에 쌓여 우리들 마음에 추억을 불러오는 반가운 손님은 오늘이 처음이다. 눈길이 두려워 바닥이 튼튼한 방수 운동화를 구입한 노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첫눈은 기다려진다. 첫눈이 오면 잊고 있었던 마음속 시간여행 때문이지 않을까?
어릴 적에는 첫눈 오는 날 동네 아이들 모두 나와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녔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강아지도 덩달아 뛰었다. 노래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허공에 입을 벌리면 살짝 내민 혀에 하얀 눈송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차갑지만 솜사탕처럼 부드러웠던 그 감촉! 누구도 우리에게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어른들이 빨래를 했던 냇가에 기온이 내려가 얼음까지 얼어있으면 힘쎈 남자애들은 냇가 가장자리를 괭이로 찍었다. 누군가 긴 장대를 몽땅 가져왔고 넓고 넓은 얼음 덩어리에 모두 올라가 장대를 냇물 바닥에 대고 다 같이 영차를 외치며 힘을 합치면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조금씩 움직였다.
두둥실 얼음 덩어리가 이동하면 우리는 배를 탔다고 표현했다. 위험하다고 외치는 어른들의 고함소리가 들릴 때까지. 어쩔 수 없이 냇가 가장자리로 뛰어내리다 발목이 차가운 물 속에 빠지는 아이도 있었다. 먼 거리를 가지는 못했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얼음 배에서 느꼈던 짜릿함. 아쉬움이 가득한 채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면 손가락이 문고리에 닿았을 때 찰싹 달라붙는 또 다른 짜릿함.
미끄럼틀은 없지만, 엉덩이 밑에 비료 포대를 깔고 언덕길을 내려올 때 상쾌하고 시원한 스릴감.
12월 24일 밤 커다란 선물 자루를 둘러매고 온 동네를 돌았던 새벽송.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제 70 중반의 할아버지가 된, 공군사관 학교 합격하고 고모 집에 온 사촌오빠의 제복 위에 쌓인 멋진 눈.
아이젠도 없던 시절 동아리 친구들과 지리산 산행을 하며 졸졸 흐르던 샘물까지 얼어붙어 라면도 끓이지 못할 때 생라면 먹고 물병에 남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단체로 입 벌리고 해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던 젊음.
첫눈 왔다고 전 직원에게 가나 초콜릿을 돌렸던, 고인이 된 교장 선생님.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교감 선생님! 첫눈 왔는데 오늘 외식하고 와도 될까요?" 쾌히 승낙해 주셔서 학교 주변 레스토랑에서 즐겼던 양배추 위에 토마토케첩 얹고, 빠알간 방울토마토로 장식한 옛날 돈가스.
폭설이 불편한 결혼식장에서 시집가는 날 눈이 많이 오면 나중에 잘 산다고 위로해 주셨던 하객들.
아들딸과 눈 사람 만들어 놓고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어묵 꼬치와 따끈한 국물.
아이들 겨울방학 때 학원 포기하고 여벌의 옷과 신발을 챙겨 기차 타고 떠난 내장산. 폭설로 입산 금지되어 입구에서 남극이라며 실컷 뒹굴고, 눈싸움하고 식당 난로 앞에서 호호 불며 말리던 젖은 손가락.
동료 교사들과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며 9시간 동안 눈에 담아온 성판악, 백록담 코스 한라산.
2월 산행에서 갑자기 만난 태백산의 눈꽃.
눈이 오면 털신에 새끼줄을 칭칭 동여매고 새벽예배를 가셨던 엄마의 뒷모습.
첫눈이 오면 무조건 와주겠다고 약속한 첫사랑은 매년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오늘 아침 식사를 같이했다.
그 첫사랑과 함께 마당 제설을 마치고 들어오니 어깨가 뻐근하다. 그래도 커피 향기는 오늘이 가장 맛있다.

▲사진 속 추억으로 남아있는 겨울 이야기 ⓒ 이지현
눈송이가 입속에 들어가도 걱정 없는 깨끗한 세상, 누구와도 어울려 맘껏 놀 수 있는 왕따 없는 세상, 꼰대가 아닌 멋진 직장상사가 있는 세상, 반복되는 일상에 선물 같은 쉼표를 느끼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려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