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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6 13:44최종 업데이트 26.01.26 13:44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안내서

[리뷰] 책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을 읽고

두 아이가 어릴 때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어느 식당을 가면 좋을까 검색을 하는데 떡하니 '노키즈존'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 뒤로 여행을 하는 내내 속에서 울그락불그락 내내 화가 올랐다. 당신들이 뭔데 수많은 '키즈'들을 향해 "NO!"라고 외치는가, 따지고 싶었다. 난 그 뒤로 성인들끼리 가더라도 노키즈존을 표방하는 곳은 가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노키즈존'의 존재를 알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단어와 그에 응하는 어른들로부터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바람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졌고, 노키즈존에 대해 알게 된 아이들은 진심으로 분노를 했다. "이건 차별이야!", "어른들은 갈 수 있는 곳에 왜 어린이는 못 가게 하는 거야? 그게 말이 돼?"라며 왠지 모를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노키즈존이라는 것은 없어져야 해. 어린이의 존재를 부정하고, 차별하는 곳에는 엄마는 발도 들이고 싶지 않아. 너희들의 의견에 100% 찬성해"라며 함께 분노했다.

최근 유독 둘째 아이는 '차별'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담임 선생님이 급식으로 나온 떡볶이를 자기는 많이 가져가고, 우리한테는 두 개씩만 가져가래. 차별이야", "체육 시간에 여자애들이 힘들다고 하면 먼저 교실로 들여보내주고, 남자애들은 안 들여보내줘. 차별이야", "선생님이 우리 얘기는 안 듣고, 여자애들 말만 들어줘, 차별이야" 등 거의 1년 내내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담임선생님 대신 내게 열심히했다. 처음에는 귀엽게만 여겼는데 듣다 보니 정말 억울할법한 내용들도 제법 있었다. 먼저 물어보지 않으면 얘기를 꺼내는 법이 없는 큰아이에게도 학교에서 차별을 받은 적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술술 여러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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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받았다고 느끼는 여러 경험들이 있어서 그랬을까. 아이들이 웬일로 책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2025년 10월 출간)에 관심을 보였다. 홍성수 교수가 쓴 책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은 '차별'로 시작해서 '차별금지법'으로 마무리된다. 차별이 어떻게 생겨나고, 왜 확산되는지, 차별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과 답을 찾아 나간다. 특히 차별의 정의와 종류, 역차별의 쟁점, 종교와 차별 문제, 그리고 차별금지법의 역사와 구체적인 내용,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여러 논란들과 오해와 필요성을 역설하며 차별 없이 평등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향해 머리를 맞댄다. '차별'을 둘러싼 거의 모든 내용과 쟁점들을 망라해 '차별종합백과사전' 혹은 좋은 안내서를 만난 것만 같다.

오래 전, 동네 언니와 커피를 마시다 동성애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언니는 "동성애자가 차별을 받는 걸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시내에 나와서 퀴어퍼레이드를 하는 등 집단 행동을 하는 게 싫어. 그들이 동성을 좋아할 권리가 있다면 나는 그들을 싫어할 권리가 있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좋아하고 말고가 '권리'의 영역이던가? 언제부턴가 '권리'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이권'이 '인권'으로 둔갑하고, 누군가를 향한 혐오가 마치 '권리'로서 보장받아도 되는 것인양 쓰이고 있다. 백 번 양보하여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싫어하는 그 마음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게 마치 '권리'로서 포장되는 순간 그들이 행하는 차별은 얼마든지 합리화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합리화를 마친 차별은 죄의식 없이 차별할 수 '있는' 권리라는 이름으로 확장되는 건 시간 문제이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 홍성수 저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홍성수 저 ⓒ 도서출판 어크로스

이에 저자 홍성수는 책의 제2장에서 차별을 적절히 규제하지 않으면 차별이 허용되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라며(46쪽) 사람들이 어느 순간 거리낌 없이 차별에 동참하는 것에 대한 '브레이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키즈존이 '노시니어존', '노아줌마존', '노아재존'으로 확대되고 진화한 것처럼, 차별은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으면 누군가의 존재를 배제하고 부정하는 방향으로 커져 버린다. 누군가는 이걸 '자유'의 문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히틀러의 '자유'였던 것일까. 자유는 허공을 자유롭게 가르는 칼날이 아니다. 결국 그 칼을 휘두르는 사람의 의지대로 휘둘러지는 것이니, 내가 칼날을 잡을지 상대의 손을 잡을지는 내 자유 의지에 따르는 것. 단, 칼날을 잡았을 때에는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차별에 대한 적절한 규제 즉,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너무나 잘 보인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백화점을 들어가려는데 못 들어가게 해 실랑이를 하는 노동자의 모습에, 동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에,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인간 사냥을 당하며 몸을 피하다 높은 곳에서 추락한 뚜안의 삶에서 우리는 짙은 색의 차별을 발견할 수 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과 정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된다면 굳이 법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차별금지를 법을 규정하고 있고,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말을 들어보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나라가 오직 대한민국만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일찌감치 차별금지법을 제정한 국가들도 많을 뿐더러,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세계적으로 차별금지 사유를 자세히 규정하는 추세라고 한다. 몇 년 째 제자리 걸음인 우리나라의 차별금지법안의 현실을 본다면 우리나라는 역시 '겉'으로만 인권 선진국인 척 하는 것이 맞다.

특히 저자 홍성수는 이 책에서 '구조적 차별'의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홍 교수에 따르면, 고전적인 형태의 차별은 개인이 소수자 집단의 한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형태였지만, 그것이 법으로 금지되고 규제를 받고 나서부터는 '구조적 차별'이 새로운 형태의 차별로 등장했다고 말한다(260쪽). 예를 들어, 장애인 고용을 거부한다고 명시한 기업은 없지만 여전히 기업들은 장애인 고용을 기피하고, 성소수자는 채용하지 않는다는 공고는 없지만 성소수자들은 고용 기회가 제한적이라고 호소한다는 것이다.

차별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구조적 차별에 있다는 것인데, 나는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정말 안 보이는가? 보이지만 안 보이는 '척' 하는 것은 아니고? 개인의 회피가 집단의 회피로, 집단의 회피가 국가의 회피로 확대되어 가는데 표를 잃을까 무서워 차별금지법안을 앞에 두고 제자리걸음 중인 정치인들의 행태가 퍽 우습다. 그대들도 가해자와 다를 거 없다는 걸 왜 모를까. 그러니 대선 후보라는 사람이 토론회에 나와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 아닌가. 무식이 용기가 아니라, 정치인들의 머뭇거림이 쓰레기 같은 용기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결국 책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의 결론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으로 귀결된다.

'문제는 구조적 차별의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차별금지 정책의 필요성도 부정한다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형식적으로 문제없어 보이는 공식적 법·제도의 틈새에 은밀하고 교묘하게 소수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관행과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차별의 범위를 확대하고, 차별 판단 기준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효과적인 차별 구제 방법을 모색해왔다. 이것이 차별금지 정책이고, 그 기본법이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266쪽)

우리 사회는 안타까운 사연의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화르르 분노한다. 누구는 청원을 넣고, 누구는 SNS에 추모 릴레이를 하고, 누구는 편지를 쓰고, 누구는 사건 현장에 헌화를 하는 등 슬픔의 연대를 이어간다. 하지만 딱 어느 순간부터 연대가 뚝 끊겨버린다. 바로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운동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가 '정치적으로 이용' 당하기 싫다며 다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정치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은 이해하나, 불행히도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으면 그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다. 그저 추모만 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악순환을 계속해서 겪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결국은 '법'의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법 만능주의'는 경계하나, 필요한 법은 반드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저자 홍성수는 이제는 차별금지 원칙을 정치적으로도, 법률적으로도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차별금지법 제정은 한국 사회가 혐오와 차별과 결별한다는 점을 '정치적'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에게는 남아 있는 기회를 꼭 놓치지 말 것을 강조한다.

다시 돌아와 우리 집 둘째의 이야기다. 자신이 차별을 당했다고 느낄 때마다 "엄마, 나 신고할 거야. 차별하면 안 되는데 차별했으니까 나 누구 누구 누구 신고할 거야"라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되묻는다. "그 사람이 처벌을 받으면 끝인 거야? 다른 사람들은 같은 차별을 또 안 할까?" 11살인 아이는 그 때마다 신고를 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말 한 마디에 아이가 좌절을 했다. "근데 중요한 건 아직 차별금지법이 안 만들어졌어" 아이의 눈빛이 변하더니 "그럼 차별을 받아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거야?! 도대체 정치인들은 뭐하는거야? 누가 반대해?"라며 방방 뛴다.

웃긴 해프닝 같지만 아이의 말속에 우리가 해야 할 고민과 답들이 숨어있다. 정치인들은 정말 뭐 하고 있나? 앉아서 계산기로 두드리는 표의 개수와 인간의 존엄성은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인가? 차별을 받은 사람은 혼자 울게 두면 되는 것인가? 구조적으로 받는 차별은 누구의 책임인가? 11살 어린이도 하는 고민을 저들은 왜 자꾸 안 하나 모르겠다. 차별하지 않는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착각은 자유이나, 나의 착각이 또다른 차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인권>에도 실립니다. 배여진 이사가 직접 쓴 글입니다.


#차별하지않는다는착각#홍성수#천주교인권위원회#차별금지#반차별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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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여진 (chrc) 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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