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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의 은퇴이몽’은 퇴직 4년차로서 은퇴 전후의 현실을 기록합니다. 숫자만이 아니라 몸, 관계, 생활기술, 돌봄, 역할의 전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 봅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리라는 거야…."

갱신 카드 문제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가, 대기번호 앞에서 그 생각이 올라왔다. 안내가 끝나지 않는다. 누르고 또 누른다. '상담원 연결'을 누르는 순간부터 대기다. 기다리다 보면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보다 '언제 연결되나'가 더 큰 문제가 된다. 한참 뒤 연결되면 목소리가 거칠어진 나를 발견한다.

이런 느낌은 최근 들어 벌써 두 번째다. 얼마 전에는 증권계좌 앱 문제로 고객센터 안내를 따라 했지만 번번이 막혔고, 결국 직접 방문해 정리했다. 해결은 됐지만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다. 퇴직 전에는 이런 일도 비교적 여유 있게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서는 사소한 대기에도 짜증이 먼저 올라온다. 상담원 탓이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다.

퇴직 후 밀려드는 처리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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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건 성격이 아니라 상황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크고 작은 번거로움이 일과 일정 사이에 섞여 지나갔다. 결정해야 할 일이 있어도 "퇴근하고 보자" 하며 잠시 뒤로 미룰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처리할 일이 분산돼 있었다.

내가 일 때문에 당장 움직이기 어려울 때는 아내가 대신 처리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처리했다. 생활 업무가 부부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뉘어 굴러갔다. 그런데 퇴직 후에는 처리해야 할 대부분의 일이 내 이름으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아빠 병원 진료 마치면 올 때 OOOO백화점에 구두 맡긴 것 찾아오고…. 아, 그리고 우유 큰 거 하나 부탁해…."

퇴직 이후 늘어난 시간이 '비워진 시간'이 아니라 '처리할 시간'으로 채워지는 방식이다. 퇴직하고 나서 일상은 자꾸 '셀프 처리 모드'로 정착한다.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전화 한 통, 예약 하나, 서류 한 장, 작은 수리 하나까지. 겉보기엔 사소한데 붙잡으면 길어진다.

"된다"는 말은 빨리 오는데 "끝났다"는 결론은 한참 뒤에 온다. 처리할 일이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 쉬는 시간도 쉬는 게 아니다. 몸은 소파에 있어도 마음은 대기번호 앞에 서 있게 된다. 이런 '처리 모드'는 집수리에서 가장 크게 체감된다.

다가구를 지은 지 15년이 되었고, 2~3년 전부터 보일러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도 그랬고 세입자도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다. 한겨울에 "보일러가 안 돌아가요"라는 연락이 오면 그날 일정은 즉시 바뀐다. 세입자에게는 오늘 밤이 걸린 문제이고, 나에게는 '지금 당장'이 또 하나 늘어나는 순간이다.

보일러 수리 퇴직 후 2개월 보일러 1차 수리...그리고 3년 후 2차 수리
보일러 수리퇴직 후 2개월 보일러 1차 수리...그리고 3년 후 2차 수리 ⓒ 이종범

올해 1월 초, 보일러가 다시 말썽을 부려 두 번째 수리가 진행되면서 아내와 부딪쳤다. 이번 2차 수리는 세입자 쪽에서 먼저 진행한 뒤 통보해 준 건이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산뿐이었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아내가 한 마디를 던졌다.

"3년 전에 처음 수리할 때 새걸로 갈았으면 이런 일 없잖아."

그 말은 '지금의 비용'보다 '그때의 판단'을 다시 끄집어내는 불만 표출이었다. 고장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판단의 책임까지 내 몫으로 돌아온 셈이다. 퇴직 후의 집수리는 수리만이 아니라 결정과 감정까지 함께 따라온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보일러만이 아니다. 집의 연차가 쌓일수록 보수 주기는 빨라진다. 옥상 누수나 지층 주차장과 도로 경계 파열 같은 일은 결국 업자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비용은 늘 기본 인건비, 재료값, 추가 공정으로 불어난다. 게다가 우리 집은 가로주택정비사업이 진행되는 구역이라 큰 비용을 들이는 것도 망설여진다.

기껏 수리해놓고 정비 국면으로 들어가면 그 돈이 아깝다는 계산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고치느냐 마느냐'보다 '어느 선까지 버틸 것이냐'가 더 큰 고민이 된다. 집수리는 어느 순간부터 '고장 수리'가 아니라 '비용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이 잦아질수록 피로는 더 빨리 쌓인다.

 퇴직 후 집은 어느새 쉬는 곳이 아니라 처리 과제가 쌓이는 공간으로 바뀐다.
퇴직 후 집은 어느새 쉬는 곳이 아니라 처리 과제가 쌓이는 공간으로 바뀐다. ⓒ james2k on Unsplash

물론 작은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한다. 건물 계단이나 복도 LED 등이 나가면 갈아 끼운다. 세면대 수도꼭지, 씽크대 배수 관이 새거나, 변기 물이 멈추지 않으면 직접 조치할 정도는 된다. 문제는 고장 자체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수리는 곧 결정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고, 비용의 크기는 물론, 결과까지 감당해야 한다. 이 결정이 반복될수록 집은 쉬는 곳이 아니라 처리 과제가 쌓이는 공간으로 바뀐다.

가정 생활 처리 담당자의 역할

디지털 일상도 다르지 않다. 지난 수요일 저녁, 아내가 넷플릭스 성인 인증을 해달라고 했다. 나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어 붙잡았다. 그런데 계속 실패였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같은 화면으로 되돌아오기만 했다. 짜증보다 민망함이 먼저 올라왔다. 결국 그날은 넘겼다.

주말 저녁에 다시 시도하다가 이유가 떠올랐다. 가입할 때 아들 아이디로 설정해 두었으니 내 힘으로 풀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결국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몇 번의 터치로 해결됐다.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겹치면 하루가 잘게 쪼개진다. 대기하고, 확인하고, 정산하고, 다시 시도한다.

별일도 없는데 하루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생긴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처리할 일이 머릿속을 붙잡고 있어서다. 그러다 보면 하루 끝에 남는 건 성취가 아니라 피로다. '살아내는 하루'가 아니라 '처리하는 하루'로 기울어진 탓이다.

퇴직 전에는 일이 바빴고, 그 틈을 아내가 메운 부분이 있었다. 처리할 일이 부부 사이에서 분산돼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퇴직하면서 그 분산이 사라졌다. 생활의 처리 담당자가 내 이름으로 고정된 것이다. 처리량이 늘면 시간만 빠지는 게 아니다.

수리 방식과 교체 시점, 비용의 크기를 두고 결정을 더 자주 하게 되고, 그 결정은 곧 지출로 이어진다. 당연한 일인데도 피곤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마도 퇴직자라면 비슷한 무게를 느낄 것이다. 불편하지만 퇴직자의 일상은 그렇게 '내 몫이 된 생활'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굴러간다. 퇴직 후 짜증이 늘었다면, 마음이 좁아져서가 아니라 내가 처리할 몫이 늘어난 탓일지도 모른다.

#생활스트레스#디지털문턱#은퇴후일상#셀프처리#고정되는일처리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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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종범의 은퇴이몽

퇴직 이후 40년을 ‘어떻게 버틸까’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볼까’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듣고, 설명하고, 함께 고민해 온 이야기를 강의와 글로 천천히 풀어냅니다. 거창한 비법보다, 같이 버틸 수 있는 ‘노후해법’을 독자들과 함께 찾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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