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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있다. 보일러 온도는 따뜻하고 커피는 향긋한데, 정작 내 안의 계절은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 그럴 때면 나는 주저 없이 내비게이션에 '동해바다'를 찍는다.
여름 바다가 '축제'라면, 겨울 바다는 '위로'다.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파도 앞에 서면, 복잡했던 머릿속 찌꺼기들이 하얀 포말과 함께 거짓말처럼 씻겨 나간다. 왜 하필 강원도 동해시냐고? 여기엔 단순히 '물'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와 낭만, 그리고 도심 바로 옆의 비경이 숨 쉬고 있다. 지금 당장 동해로 달려가야 할 세 가지 이유를 꼽아봤다.
첫째, 가슴이 뻥 뚫리는 광활함이 필요하다면 정답은 '망상'이다. 망상 해변에 발을 디디면, 왜 조선의 가사 문학 대가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이곳을 노래했는지 단박에 이해하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4km의 백사장.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지워진 수평선. 송강은 관동별곡에서 이곳 망상을 "해당화가 피는 꽃밭"이라고 했다. 망상의 망은 바랄망(望), 상은 상서로울상(祥)으로 "보름달을 바라보며 복을 바란다"라며 사랑했던 소복에 대한 이별 서사를 읊조렸다. 500년 전 그가 걸었던 그 '명사십리'는 여전히 은빛으로 빛난다.
여름철 피서객으로 북적이던 소란함이 빠져나간 겨울의 망상은 오롯이 '나'와 '바다'만이 대면하는 독대의 공간이다. 파도 소리는 더 깊고, 모래는 더 단단하다. 송강이 술잔을 기울이며 시름을 털어냈듯, 겨울 망상의 파도에 묵은 감정을 던져보라. 바다는 묵묵히 받아줄 것이다.
둘째, 도심에서 딱 5분, 비밀의 숲과 바다 '한섬 해변'이다. "바다를 보고 싶은데 멀리 가긴 싫어." 이런 얌체 같은 여행자에게 동해시는 '한섬'이라는 히든카드를 내민다. 동해시청이 있는 천곡동 도심에서 차로, 아니 슬슬 걸어도 5~10분이면 닿는 거리에 이런 비경이 숨어 있다는 건 반칙에 가깝다.

▲행복한섬동해 행복한섬 아침 여명 ⓒ 조연섭
한섬해변은 아담하다. 그래서 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행복한섬길)을 지나면,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싼 몽돌 해변이 나타난다. 제임스 본드 섬을 닮은 갯바위 사이로 부서지는 파도는 한 폭의 동양화다.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 하나 들고 터널 포토존에 앉아보라. 도심의 불빛과 바다의 어둠이 공존하는 묘한 매력. 퇴근길에 넥타이를 맨 채로 바다 산책이 가능한 곳, 한섬은 동해시민들이 숨겨두고 보는 '감성 치유소'다.

▲추암 능파대동해 추암의 하늘로 향해 치솟은 바위, 능파대 ⓒ 조연섭
마지막으로 미인의 눈썹을 닮은 기암괴석, 신라의 성지 '추암해변이다. 마지막 종착지는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유명한 '추암(湫巖)'이다. 하지만 추암을 '일출 명소'나 '촛대바위'로만 안다면 절반만 아는 것이다.
조선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는 이곳의 절경에 취해 '능파대(凌波臺)'라 이름 지었다.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추암의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기암괴석들은 거칠기보다는 우아하고 섬세하다. 28일 아침 해변에서 기자와 맨발 걷기에 도전한 강원문화예술연구소 허준구(남,62) 소장은 "미인의 눈썹을 닮은 아름다운 해변"이라고 했다.
강릉원주대학교 이상균 교수의 2024년 동해 문화에 발표된 논문 "추암 명승 구성의 문화사적 자질 요소" 에서는 이 아름다운 추암이 1500년 전 신라가 국가의 안녕을 빌던 '북해 제장(北海祭場)'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추암이 기우제 등 나라의 제사를 지내던 "제장의 장소" 였다는 것이다. 거친 파도를 향해 솟은 바위 숲을 걷다 보면, 왜 고대인들이 이곳을 신과 소통하는 성지로 삼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겨울바다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차가운 바람에 코끝이 빨개져도,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걷는 겨울 바다엔 '따뜻한 위로'가 있다.
광활한 망상에서 가슴을 열고, 소박한 한섬에서 여유를 찾고, 신비로운 추암해변은 맨발로 걸어보자.
전자파와 활성 산소를 중화시키고 새로운 자연 에너지를 채워주는 여정이 될 것이다. 열차 시간이 남았다고? 묵호의 핫플, 여행책방 '잔잔하게'와 부곡동 중심의 "요가 앤 네이처"에 들러 노을, 일출 요가 원데이 클래스를 즐겨 보는 것도 추천한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당신도 동해(東海)가 건네는 푸른 위로를 만나보며 오래 기억되는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짐은 가볍게, 마음은 급하게. 지금 바다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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