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강년 기념관 ⓒ 김명희
경상북도 문경시 이강년기념관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한말 의병전쟁의 횃불 - 운강 이강년>, <의병 항쟁 13년 - 운강 이강년의 주요 전투 이동로>, <문경의 독립운동 유공자> 등 소형 책자들을 비치해 두고 있다. 지난 1월 31일, 이들 책자에 소개되어 있는 문경 및 상주 지역 현창 시설들을 모두 둘러보았다.
기념관 경내(문경시 대야로 1683)에는 유물 전시실, 사당, 동상, 시비, 신도비, 두 기의 기념비 등이 있다. 살펴볼 것이 많으니 배울 것도 많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들도 여러 가지를 알게 해준다. 그 중 '해동 의사 운강 이선생 강년지비' 해설이 가장 새롭다.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못 본 내용이다.
첫째, 1962년 6월 3일 제막된 이 비는 독립지사를 기려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 기념비라 한다. 대구 달성토성 '나의 침실로'가 국내 최초 시비로 각광을 받고 있는 사실을 떠올릴 때 '해동 지사 운강 이선생 강년지비' 또한 관심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둘째, 비문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썼다고 한다. 놀라움에 가득 차 기념비를 두 번 세 번 살펴본다. 본래 문경 가은역 앞에 있던 것을 이강년기념관이 문을 연 2002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설명이다. 역 자체가 2004년에 폐지되었으니 잘한 일이다.

▲이강년 생가 ⓒ 김명희
기념관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대야로 1613-14에 '이강년 생가'가 있다. 생가 규모를 보면 유물전시관 안에서 읽은 "아버지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한 세 아들은 선생 순국 이후 일제 탄압으로 화전민이 되어 어렵게 살았다"는 안내문이 새삼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이강년은 이 집에서 출생해 과거에도 급제했다. 하지만 13년 의병 활동 끝에 마침내 순국했다. 아들에게 남긴 "너의 아비는 평생 혈충(血忠)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라는 유언이 눈물겹다.
의병대장 이강년
기념관 뜰 시비에서 본 문장들도 기억난다. 하나는 1908년 7월 2일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피체될 때 남긴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이라는 탄식이다. 또 하나는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수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라는 옥중시이다.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산127-2에 경모각과 기념비가 있다. 갈평삼거리 바로 앞인데, 찾아갈 때 주소로는 갈평리 557-25를 들고 다니는 것이 좋다. 산 번지는 굉장히 넓은 지역을 나타낸다, 그런 까닭에 산 번지만 알고 찾아다니다가는 헤매게 되기 십상이다. 이강년 의병대장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현지 안내판의 내용을 소개한다.
"이강년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서 이기태와 의령 남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22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분격하여 1884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1896년 2월 문경 가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 호좌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다.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국내로 돌아온 이강년은 광무 황제(고종)의 밀지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운강은 문경 갈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죽령, 단양 고리평, 백자동, 용소동 등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 청풍 까치산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이 쏜 총에 발목을 맞아 붙잡혔다.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정부에 불만을 품고 정사를 기도하여 1907년 음7월 이후 호좌창의 대장이라 자칭하고 도당을 소집하여 내란을 일으켜 충청, 강원, 경기 각 도내를 횡행'했다는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 기념비는 이강년 선생의 구국을 위한 위정척사 사상의 충정을 기리고, 갈평리 대첩의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9월 10일에 건립하였다."
안내문은 경모각과 기념비가 어째서 이 도로변에 설립되었는지 알게 해준다. 갈평마을 일대는 이강년 부대가 1907년 9월 10일과 11일 일본군 1개 소대 40여 명을 전멸한 대첩지이다. 물론 이강년 의병군이 항상 승전만 거듭했던 것은 아니다. 1896년 2월 23일 도태 장터에서 창의한 후 그 달 27일 첫 전투를 고모산성에서 치렀는데 패전했다.

▲고모산성 ⓒ 김명희
고모산성에서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 25km쯤 가면 경모각과 기념비가 나온다. 서쪽으로 도로를 따라 20km가량 가면 이강년 의병대장이 문중 유림 인사들과 산포수 및 농민군 60명으로 의진을 처음 편성했던 도태리가 나온다.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 앞에 '운강 이강년과 도태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도태리에서 2km쯤 더 서쪽에 이강년기념관이 있고, 거기서 500m쯤 재차 서쪽에 '이강년 생가'가 있다. 이강년 묘소는 고모산성에서 23km쯤 서남쪽에 있고, 이강년 등 열네 분 지사들을 함께 모시는 광복사는 묘소 가기 전 3km쯤 화북중학교 교문 앞에 있다. 광복사의 '창의대장 운강 이선생지묘' 빗돌은 묘소 앞이 아니라 면 소재지 번화가에 묘비가 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위치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답사할 곳이 고모산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다는 뜻이다. 다닐 순서를 거리와 시간을 감안해서 잘 짜지 않으면 여행이 힘들어진다. 결론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한 경우 문경새재IC에서 내려 아래 순서대로 답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① 갈평대첩지 현장, 경모각과 기념비(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557-25) ->
② 첫 전투 장소, 고모산성(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75-1) ->
③ 첫 창의 장소, 도태리 현지 안내판(문경시 대야로 1871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 앞) ->
④ 이강년기념관(대야로 1683) ->
⑤ 경상북도 기념물, 이강년 생가(대야로 1613-14) ->
⑥ 묘소(입구 주소: 상주시 문장로 2153-3) ->
⑦ 묘비 보관 장소, 광복사(문장로 1679 화북중학교 앞)

▲이강년 묘소 ⓒ 김명희
이강년 의병대장 묘소 가까이 도로변에 표석과 표지판이 있다. 하나는 돌비석이고, 다른 하나는 알루미늄 안내판이다. 둘 다 거대하다. 차를 몰고 왔을 때 결코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는 크기이다. 산 중이라 찾기 매우 어려운 장소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 성의를 보여준 분들이 정말 고맙다.
묘는 올해 중 이곳에서 이강년기념관 경내로 옮겨질 예정이라고 한다. 머지않아 현재의 묘소 일대는 '묘터'로 바뀐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묘는 물론 두 이정표도 볼 수 없게 된다. 그런 생각으로 바라보자 돌비석과 알루미늄 안내판을 응시하는 마음에 애틋함이 깃든다. 찾아오는 참배객들을 맞이하느라 오랜 세월 무척 애썼을 터인데...
깊은 산중 쓸쓸한 묘소 하나
계곡 안으로 들어서니 멀찍이서도 묘소 입구가 확인된다. 커다란 안내판을 보고 짐작한 결과이다. 이강년 의병대장 묘소가 없으면 저런 곳에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을 리 없다. 주변 자체도 묘소마저 전혀 없는 깊은 산중이다. 과연 주차 후 조금 걸어올라가 보니 '도체찰사 이강년 선생 묘소'라는 제목 아래에 해설문이 쓰여 있다.
묘소 가는 오르막길은 85m 돌계단으로 다듬어져 있다. 계단 좌우로 설치된 철책 손잡이가 고령 답사자들의 안전을 돕는다. 안내판에 따르면 출생지도 전승지도 아닌 이 산중 오지에 이강년 묘소가 조성된 것은 "왜놈들이 선생의 처형으로 인하여 후사에 봉기가 두려워 비밀로서 선생을 충북 제천 모 지역에 유기"하였고, "1944년 상주 화북 출신인 부하 이원제, 이섬범 등이 유기된 시신을 거두어 죽음을 각오하고 여러 날 동안 낮에 숨고 밤으로 이동하여 이곳 상주 화북으로 안장"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내판은 또 이곳에서 "매년 삼일절에 향사를 80년 간 올리고 있다"고 해설한다. 오는 삼일절에도 묘소가 이강년기념관으로 이장 되지 않고 이 자리에 있다면 찾아와 절을 올리고 싶다. 이 깊은 산중에서 그 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왼쪽) 55년 만에 발견된, 이강년 기념비 (오른쪽) 비가 세워져 있는 상주 광복사 ⓒ 김명희
묘소 입구 안내판 마지막 문장에 "최초의 석물은 1970년 대통령 하사로 세웠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1970년 묘소 일원에 최초의 석물이 세워졌고, 그 건립 비용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인 개인 돈 또는 정부 예산으로 조달했다는 뜻이다.
이때 세워진 석물에는 묘비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행방불명되었다. 1970년 당시부터 몇 해 정도만 실물을 볼 수 있었고, 그로부터 오랫동안 자취가 묘연해졌다. 기념비가 땅속에 묻혀 있다는 소문만 줄곧 전해져 내려왔다. 누군가 의도한 바 있어 매립한 것이겠지만 실행자의 신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묘비가 지난 10월 26일 길고 긴 55년 만에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상주시 화북면 유림단체 유도회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 조사를 했고, 그 결과 출토되었다. 높이 약 1.6m, 폭 40cm 크기의 비문 앞면에는 '창의대장 운강 이선생지묘(倡義大將 雲岡 李先生之墓)'가 뚜렷하다.
비석 옆면과 뒷면에 이강년 의병대장의 항일 활동이 기록되어 있고, 글 끝에 '1970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명에 의하여 상주군수 비를 세우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 지시로 묘비가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비는 그 뒤 상주 지역 독립지사들을 함께 모셔온 광복사 뜰에 다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