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해 추암해변7일 아침, 보통 남자 키 만큼 언덕을 만든 동해 추암 해변의 해안 침식 현장 모습 ⓒ 조연섭
입춘이 지났지만 동해의 바람은 여전히 날이 서 있다. 주말인 7일 아침, 잠시 풀렸던 날씨를 비웃듯 다시금 매서운 한파가 해변을 덮쳤다. 하지만 762일째 매일 아침 맨발로 이곳을 걷으며 기록해 온 기자의 발바닥 감각은, 이 한기가 단순한 기온 탓만이 아님을 직감한다.
계절은 봄의 문턱을 넘고 있지만, 동해 추암 해변의 풍경은 계절과 어긋나 있다. 따뜻해질 봄 볕을 기다리는 해안선은 비명 없이 깎여 나가는 중이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가파른 모래 절벽(침식면)이 곳곳에 흉터처럼 붉은 흙을 드러냈다.
화사한 봄을 준비하는 이면에서, 해변은 조용하고도 급격하게 뒷걸음질 치고 있다. 추암은 예로부터 '미인의 눈썹'을 닮은 해안선과 능파대의 절경을 자랑해 왔다.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곡선과 일출에 비치며 나타나는 잔 물결이 주는 윤슬이 어우러진 중심에는 그 유명한 촛대바위가 서 있다.
그러나 오늘 마주한 추암은 감탄보다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날씨 변화와 무관하게 해안 침식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겨울 들이닥친 너울성 파도의 잔흔과 인공 구조물의 영향이 중첩되면서 모래의 자연스러운 순환 고리가 끊어진 탓이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완만한 백사장 대신 깎아지른 흙더미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물론 자연의 자정과 복원력을 믿을 수밖에 없다. 계절 풍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면 떠나갔던 모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변이 제 모습을 되찾기를 마냥 기다리기엔, 당장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안전이 너무도 위태롭다.
모래가 쓸려나가 형성된 낭떠러지 근처, 아슬아슬하게 사진을 찍거나 산책을 즐기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파랑의 변화, 잦아진 기상이변, 그리고 연안선을 고정하려는 인공 구조물들이 합작하여 만든 이 위험한 지형은 관리와 설계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단기적인 모래 채움이나 임시방편 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7일 오전 기자는 정강선 전, 백두대간보전회 회장에게 질문했다. 반복되는 이 해안 침식을 어떻게 보시나요?
"모래의 이동 흐름 자체를 회복하는 연안 설계와 기존 구조물에 대한 단계적 재검토, 그리고 계절과 파랑의 변화를 읽어내는 장기적인 모니터링이 시급합니다. "
침식으로 보행 동선이 좁아지고 모래 언덕의 붕괴 위험이 커지면, 해변은 추억을 쌓는 장소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곳으로 변질된다. 안전은 곧 지역 주민의 일상이며, 일상이 무너지고 안전이 담보 되지 않는 곳에 관광의 미래는 없다.
관광의 상징을 지키는 일은 소비를 늘리는 단기 부양책이 아니라, 보존을 설계하는 백년대계여야 한다. 자연을 콘크리트로 고정하는 대신 물길과 모래의 흐름을 복원하는 선택, 그 어려운 결정이 다음 세대가 누릴 해변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다.
맨발은 숫자가 아니다. 그 어떤 기계보다 예민한 기록 장치다. 762일 동안 발바닥으로 읽어낸 오늘의 추암은 우리에게 말한다. 봄은 왔지만 해변은 아직 겨울 속에 갇혀 있다고. 그리고 지금은 걷는 것 만큼이나 목소리를 높여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요구해야 할 때라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