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종 잠저 용흥궁의 현판. '용이 흥하게 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전갑남
강화도 읍내에는 좁은 골목 사이로 예사롭지 않은 기와집이 있다. 바로 철종 임금이 즉위하기 전 거주하였다는 터, 용흥궁(龍興宮)이다. 차량으로 이동하기조차 곤란한 이 좁은 고샅길은 사실 조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와 그 뒤에 가려진 비극적 생애가 시작된 곳이다.
용흥궁 대문 앞에는 세월의 풍파를 견뎌온 두 개의 영세불망비가 나란히 서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정원원과 정기세이다. 정원영은 철종 즉위 당시 영의정으로서 왕을 직접 영접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철종과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고, 그 아들인 강화유수 정기세는 철종의 옛집을 지금의 용흥궁으로 새로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강화도령의 투박한 손을 왕의 가마로 인도하고, 아들은 뜨거운 역사를 다시 세워 철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철종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정원영, 정기세 부자의 공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용흥궁 대문을 지키고 있다. ⓒ 전갑남
대문에는 '용이 흥하게 된 궁궐'이라는 뜻의 용흥궁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강화유수 정기세의 필치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들의 뜻대로 왕을 세우고 흔들었던 세도 정치의 상징적인 장소를 훗날 그 세력을 몰아낸 대원군이 직접 썼다는 설이 전해지는 것 또한 역사가 남긴 기묘한 아이러니와 같다.
산골 소년에서 일국의 군주로
때는 1849년, 조선 제24대 왕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은 큰 위기에 빠졌다. 권력을 쥔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다루기 쉬운 왕을 세우기 위해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전계대원군의 아들인 이원범을 주목했다. 역모의 풍파 속에 가문이 몰락하여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이 몰락한 왕족 청년에게 조선의 운명이 예고 없이 찾아온 것이다.
무더위가 절정을 이루던 어느 날, 강화도에는 영의정 정원영을 위시한 거대한 행렬이 들어왔다. 그 길이만도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한갓 농사꾼 이원범은 자신을 태우러 온 행렬을 보고 역모로 죽이러 온 군사들인 줄 착각해 산으로 도망쳐 숨었을 정도였다. 그의 등극은 예고 없는 폭풍과도 같았다. 중앙의 권력과 지방의 행정이 손을 잡고, 산속에 숨어 있던 나무꾼의 지게를 벗겨 용포를 입힌 극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신데렐라 이야기의 끝은 행복하지 않았다. 안동 김씨 세력은 다루기 쉬운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고, 나무꾼 원범은 그들에게 최적의 인물이었다. 왕좌에 올랐으나 철종은 세도 정치의 칼날에 휘둘리며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다.
철종의 가슴을 더욱 짓누른 것은 강화도 고샅길에 두고 온 애틋한 인연이었다. 비록 공식 역사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강화도 주민들 사이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처녀 '양순이'와의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나들길 곳곳에 서려 있다.
궁궐의 화려함 속에서도 양순이와 나누던 소박한 밥상을 그리워했지만, 안동 김씨의 견제는 끝내 재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야사에 따르면 끝내 전해지지 못한 그리움을 품고 세상을 떠난 양순이의 소식을 들은 철종은 강화도를 향해 눈물지을 뿐이었다.
낮은 곳의 눈물을 닦으려 했던 군주의 처절한 몸부림
용흥궁 안으로 들어오면 '궁(宮)'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소박한 민가의 형식을 띠고 있는 건축미가 가슴을 파고든다. 원래 초가집이었던 곳을 고종 때 기와집으로 중건했지만, 여전히 낮은 담장과 소박한 채 나눔을 유지하고 있다.

▲'궁'이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 숨겨진 민가 형식의 소박한 용흥궁. ⓒ 전갑남

▲강화도 좁은 고샅길에 있는 철종의 잠저 용흥궁. 이제는 우리가 그 너머의 진심을 읽어야 할 차례다. ⓒ 전갑남
건축적으로 용흥궁은 조선 후기 상류 주택의 전형적인 '잠저(潛邸)' 형식을 잘 보여준다. 특히 안채 마당 한구석, 작고 단단하게 서 있는 '철종잠저구기(哲宗潛邸舊基)' 비각은 이곳이 단순한 가옥이 아니라 한 시대의 운명이 바뀌었던 지점임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화려한 단청을 배제한 소박한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각 독립된 영역을 확보한 구조는 실용성과 격식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철종은 흔히 '나약한 왕'으로 치부되곤 하지만, 실상은 시대의 한계에 부딪힌 비운의 개혁가에 가까웠다.
1862년 전국적인 민란이 발생하자, 그는 직접 지게를 졌던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듬고자 했다. <철종실록> 13년 6월 10일의 기록은 그의 진심을 여실히 드러낸다.
"삼정(三政)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이정청(二整廳)을 설치해 강구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의논해 교정(矯正)하고 있는데, 이는 조정에서 크게 새롭게 하는 것과 관계된 것이므로 널리 묻고 널리 채집하여 사리에 꼭 맞도록 힘쓰지 않을 수 없다."
이 당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려 했던 한 군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어쩌면 그는 세도 정치의 높은 벽 앞에서도 사람의 온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지독한 '휴머니스트'는 아니었을까? 권력의 정점인 왕좌에 앉아서도 가장 낮은 곳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던 그의 진심이 이 소박한 용흥궁 마당 곳곳에 스며 있는 듯하다.
화려한 감옥에서의 시듦, 그리고 예고된 종말
하지만 철종의 개혁 의지는 안동 김씨 세력의 견고한 성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삼정이정청은 설치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폐지되었고, 그가 꿈꿨던 민생 안정이 물거품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철종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강화도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농사를 짓던 건강한 청년 이원범은, 어느덧 구중궁궐의 습한 그늘 아래에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철종의 말년은 지독한 고독과 병마의 연속이었다. 그는 안동 김씨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술로 시름을 달래는 날이 많았고, 이는 만성적인 소화기 질환과 폐결핵으로 이어졌다. 1863년 12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조선의 제25대 임금 철종은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강화도 나무꾼에서 일국의 군주가 된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철종의 마지막은 고독했을지 모르나, 사후의 길은 외롭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고종은 비록 혈연은 아니었으나 법통상의 아버지인 철종을 극진히 예우했다. 고종은 경기도 고양시에 철종의 능인 예릉(睿陵)을 조성하며 조선 전기 왕릉의 모범인 장릉(長陵)의 양식을 따르게 하여 선왕의 위엄을 세웠다.
특히 이곳은 세도 정치의 비바람을 함께 견디며 묵묵히 철종의 곁을 지켰던 철인왕후(哲仁王后)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훗날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며, 강화도령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그의 격을 왕실 최고의 반열에 올렸다. 강화도의 좁은 고샅길에서 시작된 한 남자의 고단한 여정은, 고종의 정성 어린 손길을 거쳐 비로소 황제의 안식처에서 온전한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타버린 어진 너머로 마주하는 170년 전의 진심
비록 몸은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예릉에 누웠으나, 그의 넋은 화려한 왕릉보다 이곳 강화도의 비좁은 고샅길, 용흥궁의 낮은 툇마루에 더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용흥궁의 정갈한 방 한구석을 보며 문득 한 가지 바람이 스친다.
철종은 조선의 임금 중 드물게 어진(보물 제1492호)이 남아 있는 분이다. 비록 전쟁의 포화 속에서 왼쪽 절반이 타버렸지만, 그 속에서도 강화도령 특유의 순박한 눈매는 여전히 살아있다.

▲조선 제25대 철종의 어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왼쪽 절반이 소실되었으나, 남은 부분만으로도 철종의 기품과 고뇌를 엿볼 수 있다. ⓒ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지라도, 이곳 잠저에 그의 어진이 걸려 있다면 어떨까. 현대적 복원 기술로 불에 타 사라진 얼굴을 온전히 되살려낸 모습 말이다. 첨단 기술의 힘을 빌려 170년 전 그날의 풍채를 복원해내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역사의 불길에 가로막혔던 철종 임금의 진심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용흥궁 안에 있는 철종의 잠저 비각. 화려한 단청을 입었으나, 철종의 고독한 처지를 닮았다. ⓒ 전갑남

▲'철종잠저구기'라고 새겨진 비석. 강화도령 이원범의 운명이 바뀐 지점을 증명한다. ⓒ 전갑남
견고한 유리벽 너머 재현된 온전한 얼굴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용흥궁을 찾은 여행자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가 될 것이다. 이는 곧 철종의 진면목을 마주하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리라 믿는다. 이제는 우리가 이 좁은 고샅길 속 궁의 가치를 다시금 깨달아야 할 때다. 지게를 벗고 용포를 입었던 한 남자의 고귀한 넋을, 이제라도 그 위상에 걸맞은 진심으로 받들어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in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