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학교동료들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문학학교를 개최했고 졸업식을 진행하며 찍은 사진 ⓒ 성희령
성희령은 1988년 구로구 오류여중에 입학했다. 중학교 1, 2학년 당시 담임 선생님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였다. 따로 '운동'을 한다기보다, 그냥 그 시절의 학교 분위기 속에 깊이 휩쓸려 들어간 학생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오류여중에서 '전교조 교사 지키기 활동'을 하고 고척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 안팎에서 고등학생 운동(고운)을 한 성희령씨를 지난 1월 20일 온라인으로 인터뷰했다.
"특별히 뭘 주도해서 했다기보다는, 담임 선생님이 전교조셨고, 오류여중에 해직 교사가 워낙 많았어요. 해직 교사들이 학교 앞에서 출근 투쟁하는 걸 매일 봤고요."
전교조 결성, 해직, 출근투쟁 이라는 1989년 한국 사회 전체가 출렁이던 그 흐름은 오류여중 교문 앞에도 그대로 와 닿았다.
"국사 선생님이 해직되실 때였어요. 저희가 그 선생님 마지막 수업 시간에 종이비행기를 창문 밖으로 날렸던 기억이 나요.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실 때, 창문마다 종이비행기가 훨훨 날아갔거든요."
해직 교사들이 나가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임시 교사가 들어왔다. 학생들은 어린 마음에, 그 선생님에게 수업 거부라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 선생님 수업 시간에 아예 안 쳐다봤어요. 엎드려 있거나, 딴짓하거나… 몇 주를 그렇게 했죠. 결국 선생님이 울면서 말씀하시더라고요. '나도 그 선생님이 해직된 게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요.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우리가 수업을 다시 듣기 시작했어요."
오류여중 전교생은 검은 리본을 달고 다녔다. 해직 교사 복직을 요구하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이었다.
"리본 떼라고 뭐라 하시는 선생님들도 많았어요. 그래도 대부분 끝까지 달고 다녔던 것 같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다'라는 생각이였죠. 서명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어요."
오류여중은 당시 전교조 투쟁의 상징적인 학교 중 하나였다. 학내 대책위 구성, 집단 서명, 시교육위 진정, 그리고 거리 시위까지 이어졌다. 그는 1989년 8월 17일 가두시위 기록에 대해 "아마 그날은 내가 안 나갔나 보다, 잘 기억이 안 난다"며 웃었지만,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해직 교사들과 학교 쪽이 몸싸움을 벌이던 장면 만큼은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수업 시간인데도, 교문 앞에서 선생님들하고 교장·교감, 관리자들이 밀고 당기고 하는 모습이 교실 창문에서 보였어요. 그게 되게 충격이었어요. '선생님이 이런 대우를 받는구나'라는 게."
"우리가 뽑은 반장은 '노는 언니'였다"
성희령이 지금도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중학교 1학년 담임 이기자 선생님이다.
"중학교 1학년 첫 학급 회의 시간이었어요. 선생님이 '학급 회의를 너희가 진행해봐라', '반장도 너희가 후보 내고, 스스로 뽑아라'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보통은 선생님이 후보를 정해주잖아요."
그 반에는 한 살 많은, 이른바 '노는 언니'가 있었다. 학생들은 토론 끝에 그 언니를 반장으로 뽑았다.
"학교에서는 임명장은 못 주겠다, 다시 뽑아라고 했어요. '노는 애'니까, 반장을 시킬 수 없다는 거죠. 담임 선생님이 그 사실을 솔직하게 말씀해주셨고, '그런데 결정은 너희가 해라'고 하셨어요."
아이들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우리가 뽑았으니까, 이대로 가겠다."
"언니도 '괜찮다, 임명장 안 받아도 된다'고 했고요. 그렇게 한 학기를 그 언니가 반장을 했어요. 그 경험이 너무 오래 남아 있어요.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그랬을 거예요."
그에게 이 경험은 단순히 '민주적인 반장 선거'를 넘어선다.
"그전까지 내가 존중받는 존재라는 경험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은 우리 한 명 한 명을 존중해줬어요. 우리가 선택한 사람을, 학교가 반대해도 지켜주셨고요. 그게 제 삶 전체의 뿌리 같은 경험이에요."
이후 미술 선생님이었던 2학년 담임도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미술 시간에는 전교조가 만든 '참교육 노래 테이프'를 틀어놓고 수업을 했다. 교생 선생님도 '운동권 냄새' 나는 대학생이었고, 수업 시간에 민중가요와 패러디 노래를 가르쳐줬다.
"그때 배운 노래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도깨비 빤스…(웃음) 그런 유머러스한 노래부터, 진지한 노래들까지. 그냥 자연스럽게 '다른 세상'에 대한 노래와 말을 접하는 시간이었어요."

▲일기장중학교 1학년 때 쓴 일기장. 당시 담임이었던 이기자 선생님의 의견이 함께 적혀있다 ⓒ 성희령
고척고 1학년, 선배의 퇴학 철회를 요구했던 '하루 농성'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그는 고척고에서 또 다른 격렬한 장면들을 마주한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한 선배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소지품 검사에서 담배가 나왔고, 그 이후 거의 매일 체벌과 반성문 강요가 이어졌다. 모두가 "그 일 때문에 선배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유서가 있었는데, 학교가 그걸 공개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 선배 반에서 학급신문을 만들면서, 학급신문에 당시 <한겨레신문>의 네컷 시사 만화를 실었어요. 학교는 그 만화를 빼라고 했고, 학생들은 거부했어요. 그중 한 학생은 정학, 결국 퇴학까지 당했죠."
학생들은 퇴학 철회를 요구하며 행동에 나섰다. 퇴학 당한 선배의 통학 투쟁 제안은 아침에 근처 공원에서 모여 함께 학교로 들어가기. 하지만 학교는 교문을 잠그고 "한 명씩 들어와라, 안 들어오면 결석 처리하겠다"고 압박했다.
"우리는 안 들어갔어요. 그냥 교문 앞에서 앉아서 버티는 농성을 했죠. 하루 종일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실상 연좌 농성 같은 거였어요."
그날, 학교 앞에는 경찰 버스와 전경들, 그리고 헬기까지 떴다.
"솔직히 고등학교 집회에 헬기가 뜰 줄은 몰랐죠. 경찰들이 우리를 직접 잡아가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냥 그 자리에 둘러싸여 있는 것 자체가 위협적이었어요. 나갈 수도 없고, 안으로 들어가기도 싫고."
교문 앞 골목은 양옆을 건물들이 막고 있어서, 경찰이 정문을 막아버리면 사실상 작은 '포위 공간'이 됐다. 학생들은 근처 문방구 건물, 집이 그 앞인 친구네 집을 빌려 화장실을 다녀오며 농성을 이어갔다. 농성 이전부터 학교는 이미 살벌했다.
"매일 아침 등교하면 책상 서랍에 유인물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어요. 선배들이 우리 책상에 유인물을 넣어 두고는 했거든요. 학교는 선생님들을 시켜서 소지품 검사, 책상 검사, 다 했죠. 유인물 나오면 다 압수당하고, 운동장 벽에 새벽에 칠해놓은 구호는 학교가 다른 페인트로 싹 덮어버리고."
그는 그 시기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매일 아침, '오늘은 또 책상에 뭐가 들어있을까', '또 소지품 검사를 할까' 하는 불안이 계속 있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더 무서웠던 것 같아요."
학교 밖에서 이어진 연결들 – 학생의 날, 장구, 샘, 청년회
고척고 안에서의 활동보다, 실제로 더 활발했던 공간은 학교 밖이었다. '학생의 날' 기념 행사 준비를 하거나 여러 학교 학생들과 함께 그림과 극, 영상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중대였는지, 연대였는지, 고대였는지 헷갈리는데(웃음). 그때는 웬만한 큰 행사는 다 대학 강의실에서 했던 것 같아요. 줄거리를 정해 그림을 그리고, 그걸 필름으로 찍어서 OHP로 상영하는 방식의 공연도 했어요. 그 작업이 <우리 교육> 같은 잡지에 실리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구로 지역 고등학생 단체 <샘>, 강서 화곡시장 안 청년회, 서부 지역 학교들(한성고, 중대부고, 신정여상 등)과의 교류들이 이어졌다.
"<샘>에는 장구를 배우러 갔어요. 사실 활동을 열심히 하진 않았고, 그냥 장구만(웃음). 그런데 거기 선배들이 '같이 뭘 하자'고 많이 권유하긴 했죠. 구로 지역 애들이 주축이라, 저는 좀 어색하기도 하고, 혼자 가 있는 느낌이라 거리를 둔 것 같아요."
강서 청년회에서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잠깐 모임을 했다. 또 학교 안에서는 친구들과 소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거나, 직접 연극 대본을 이어 쓰기도 했다.
"책을 복사한 프린트물로 세미나를 하기도 했는데, 그 중 기억나는 게 이문열 <들소>였어요. 이 세미나는 학교 졸업선배와 다른 학교 졸업선배들, 그리고 몇 명 연합 학교 학생들이 준비하여 만든 연극 학교에서 했어요. 나중에는 <학교는 죽었다>같은 책을 읽다가 걸려서 크게 혼난 친구도 있었어요. 저는 학교 안에서 걸리지 않으려고, 운동하는 친구를 다른 반에서 만나도 일부러 모른 척 지나치기도 했고요."

▲<학생 자치 활동> 책 표지고운 활동가들이 함께 읽으며 학생 자치와 학내 민주화에 대한 세미나에서 자주 읽던 책이다 ⓒ 성희령
고2 때 입시 포기, 공장에 들어가려 했던 마음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성희령은 입시를 포기한다.
"그때는 경쟁교육에 대한 비판 의식이 되게 강했어요. 대학 서열 같은 것도 싫었고요. 그래서 대학은 안 가야겠다, 차라리 공장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미 공장에 들어간 선배들이 있었다.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시점에서 그는 그 선배들과 함께 노동운동의 길을 모색하려 했다.
"마르크스 책으로 세미나를 하기로 약속했어요. 저랑, 또 다른 고등학생 친구랑, 공장 다니는 언니랑 셋이서요. 졸업 무렵에 세미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약속한 날 언니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어요."
그는 언니에 대해 중대부여고 출신이었던 것 같다고 기억하지만, 확실치 않다. 그저 불안정한 생활, 갑작스러운 실종, 그리고 염려만 남았다.
"원망은 안 했어요. 그냥 걱정만 됐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금까지도 몰라요."
그 길이 막히자, 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공장에 갈 수 없다면, 그냥 대학을 가야 하나?"
결국 그는 졸업 후 재수를 선택했고,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럼 운동을 하더라도 대학 가서 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갔다.
"소심한 아이를 사회적인 사람으로 바꿔준 경험"
중·고등학교 시절의 운동 경험이, 그의 인생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원래 저는 되게 소심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경험을 통해 사회성이 생긴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사람들 만나고, 함께 일하고, 뭘 준비하고… 그런 걸 그때부터 배운 거죠."
무엇보다도,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그전에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류여중, 고척고를 거치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경쟁교육에 대한 비판은 지금까지도 제 안에 크게 남아 있고요. 제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그때 공부를 좀 더 해둘 걸'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조금 더 진지하게 전공도 고민해보고,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이런 후회요."
하지만 그 후회는 오래 가지 않는다.
"이 긴 인생에서,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지금 하면 되지 싶어요. 그래서 요즘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때 못 했으면, 지금부터 하면 되지 뭐' 하고요."
다시 10대로 돌아가면 어떻게 할 것 같냐고 묻자,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아마… 비슷하게 살 것 같아요. 중학교 때 그 담임 선생님을 다시 만나도, 고척고 교문 앞에서 다시 농성을 하게 돼도요."

▲안산공동체미디어 단원FM 오픈 마이크사회를 보고 있는 성희령(가운데) ⓒ 성희령
힘들었던 밤들, 전교조에 '미쳤다'던 동생
그의 10대는 항상 '즐겁고 재밌는 운동'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밤, 두 살 아래 동생이랑 엄청 싸웠어요. 동생이 저한테 '전교조에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새벽까지 싸웠어요. 엄마가 밤에 나와서 '남들 다 자는 시간에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한소리 하실 정도로요."
그 일 이후 그는 동생에게 전교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됐다. 가족 안에서도, 전교조와 해직 교사 문제는 쉽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때는 선생님들이 해직되고, 교문 앞에서 몸싸움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몰입했던 것 같아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가 이해가 안 되고, 그게 너무 부당하다고 느껴져서요."
고등학교 때도 힘든 순간은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소지품 검사, 강압적인 분위기, '걸리지 않기 위해 친구를 모른 척 지나쳐야 했던' 장면들. 그래도 그는,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 시기를 좋은 경험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아마 힘든 기억들도 있을 텐데, 제가 일부러 잊고 사는 걸 수도 있죠."
아직도 찾고 싶은 사람, "이기자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요"
인터뷰의 마지막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혹시… 그때 제 담임 선생님, 이기자 선생님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고등학교 시절 한 번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1학년 때 담임, 반장 선거를 통해 그의 삶의 방향을 바꿔준 이기자 선생님은 그 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전교조 명단이 인터넷에 떠돌던 시절에, 이름을 검색해본 적도 있어요. 어디에 계신지 알게 되면, 꼭 한 번 연락해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못 찾았어요."
필자가 "1989년 전교조 해직교사 모임을 통해 찾아보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선뜻 "원한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저를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때 그 반장 선거, 그 한마디 한마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에게 10대의 운동 경험은,'운동했다'는 경력이나 무용담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받는 존재로 느끼게 해준 경험, 부당한 일에 분노하고, 함께 저항할 수 있음을 배운 시간,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 삶의 뿌리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조한진희님은 <고등학생운동사> 기획자이자 공저자 입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썼고 <돌봄이 돌보는 세계>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비거닝: 채식에 기웃거리는 당신에게> <라피끄: 팔레스타인과 나> <포스트 코로사 사회> 등을 함께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