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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안정을 뒤로하고 동반 퇴사한 40대 부부입니다. '조기 은퇴'라는 로망 너머의 치열한 현실과 길 위에서 마주한 삶의 가치들을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크로아티아 자다르의 겨울은 '겨울 장마'라 불릴 만큼 비가 잦다. 회색빛 하늘이 일상이 된 날씨 속에서, 구름 사이로 아주 잠깐이라도 햇살이 비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선다. 가볍게 러닝을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올드타운으로 향하는 길은, 비에 젖은 돌바닥 위로 윤슬이 반짝이는 축복 같은 시간이다.

2월의 막바지인 지금, 지루했던 겨울 장마가 물러가고 자다르에도 서서히 맑은 날이 잦아지고 있다. 유난히 화창한 오늘,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올드타운의 서쪽 끝으로 향했다. 아드리아해를 마주한 하얀 대리석 계단에 다가가자, 어디선가 낮은 저음의 울림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거대한 고래의 깊은 울음소리 같기도, 먼 심해에서 건너온 신비로운 파동 같기도 한 이 기묘한 화음. 이것이 바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악기, '바다 오르간(Sea Organ)'이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음악은 인간의 전유물'이라는 오만이 여실히 깨진다. 건축가 니콜라 바시치(Nikola Bašić)는 75m에 달하는 해안 산책로 아래 35개의 파이프를 심었다. 파도가 밀려와 공기를 밀어내면, 그 압력이 파이프를 통과하며 제각기 다른 높낮이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지휘자는 아드리아해의 바람이고, 연주자는 밀려오는 파도다.

은퇴 전,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 살던 시절의 나는 '음악'조차 효율적으로 소비하려 했다. 이어폰을 꽂고 랜덤하게 설정 된 플레이리스트를 돌려 듣던 그 무미건조한 시간들. 하지만 이곳 자다르의 바다 앞에서는 그 어떤 플레이리스트도 무용지물이다. 파도가 거칠면 소리는 웅장한 교향곡이 되고, 바다가 잔잔하면 나른한 자장가가 된다. 정해진 악보가 없기에 단 한 순간도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 않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한 연주회다.

아드리아해 아래 숨겨진 거대한 건반. 대리석 계단 끝에 뚫린 구멍들은 바다 아래 매설된 35개의 파이프와 연결되어 있다. 파도가 이 구멍으로 공기를 밀어낼 때마다 세상에 없던 신비로운 화음이 터져 나온다.
아드리아해 아래 숨겨진 거대한 건반.대리석 계단 끝에 뚫린 구멍들은 바다 아래 매설된 35개의 파이프와 연결되어 있다. 파도가 이 구멍으로 공기를 밀어낼 때마다 세상에 없던 신비로운 화음이 터져 나온다. ⓒ 김봉석

파괴의 흔적 위로 흐르는 위로의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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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오르간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신기해서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다르의 아픈 현대사가 녹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다르는 극심한 폭격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파괴된 해안가는 콘크리트 벽으로 재건되어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소외되어 있었다.

2005년, 이 죽어 있던 공간에 숨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바다 오르간이다.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졌던 해안가는 이제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여 일몰을 기다리는 평화의 성지가 되었다. 파괴된 자리에서 피어난 예술. 그것은 상처 입은 도시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세상에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화해의 방식이었다.

나 역시 은퇴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던 삶의 한 챕터를 매듭짓고 이곳에 왔다. 오랜 시간 나를 지켜주던 직장이라는 단단한 울타리를 스스로 허물고 나온 직후, 마주한 세상은 이국적인 풍경만큼이나 낯설고 설레었다. 물론 정해진 궤도를 벗어난 것에 대한 약간의 일렁임은 있었으나, 아내와 함께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해온 은퇴였기에 그 불확실성은 오히려 기분 좋은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바다 오르간의 낮은 울림은 그런 내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했다. 비워진 자리에는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기 마련이고, 그 파동을 온전히 받아들일 마음의 통로만 열어둔다면 삶은 언제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말이다.

자다르의 '바다 오르간' 소리. 하얀 대리석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울림이 아드리아해의 푸른 파도와 만난다. 인위적인 악보 없이 오직 바람과 파도가 지휘하는 자다르의 영원한 콘서트를 감상해보자. 김봉석

생존의 역사, 5개의 우물 광장으로 걷다

바다 오르간에서 감동을 채우고 올드타운 남동쪽 끝에 위치한 '5개의 우물 광장(Five Wells Square)'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 오르간이 파도가 연주하는 '청각적 위로'였다면, 5개의 우물은 척박한 세월을 버텨낸 '생존의 기록'이자 역사의 현장이었다.

16세기, 자다르는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방어벽과 요새를 쌓았고, 동시에 적의 포위 공격에도 주민들이 버틸 수 있는 거대한 지하 저수조를 만들었다. 그 저수조 위로 나란히 늘어선 5개의 우물은 당시 자다르 사람들에게는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광장 한편에 남겨진 낡은 도르래와 이제는 단단히 막혀버린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깊은 어둠 속에는, 침략의 공포가 도시를 에워싸던 시절에도 물 한 바가지를 길어 올리며 내일을 기약했던 이들의 처절함과 간절함이 여전히 고여 있는 듯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렬로 늘어선 5개의 우물은, 마치 거대한 성벽 앞에서 전우들이 어깨를 맞대고 최후의 보루를 지키는 듯한 결연함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물을 긷는 장소를 넘어, 생존을 향한 도시의 의지가 응축된 승리의 기록이었다.
일렬로 선 5개의 우물.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진 5개의 우물이 광장에 나란히 서 있다. 오래된 도르래 뒤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우물들의 모습에서 척박한 역사를 견뎌낸 자다르 사람들의 결연함이 느껴진다.
일렬로 선 5개의 우물.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진 5개의 우물이 광장에 나란히 서 있다. 오래된 도르래 뒤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우물들의 모습에서 척박한 역사를 견뎌낸 자다르 사람들의 결연함이 느껴진다. ⓒ 김봉석

우물가에서 되새기는 은퇴자의 '저수조'

지금은 우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이 광장은 여전히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우물 주위를 뛰어노는 아이들과 그 곁에서 커피를 마시는 노인들. 전쟁을 대비해 만든 '비상용 저수조'가 이제는 도시의 평화로운 '쉼터'가 된 셈이다.

나는 이 5개의 우물을 보며 우리 부부의 은퇴 자금이 생각났다. 20년 직장 생활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자산은 어쩌면 삶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를 대비한 '지하 저수조'였을지도 모른다. 화려하게 솟구치는 분수는 아닐지라도, 목이 마를 때면 언제든 두레박을 내려 생명수를 얻을 수 있는 든든한 저장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저수조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물이 마르지 않게 채우고 보살피는 '관리'와 '절제'의 마음이라는 것을 우물가에 서서 깊이 느낄 수 있었다. 5개의 우물이 자다르를 묵묵히 지켜냈듯이, 우리가 정성껏 가꿔온 소박한 자산들 역시 우리의 남은 여생을 마르지 않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 본다.

자다르는 참 묘한 도시다. 한쪽에서는 과학이 빚어낸 바다 오르간이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고, 다른 한쪽에서는 500년 전의 우물이 인간의 생존사를 웅변한다. 이 극명한 대비는 자다르를 단순히 '휴양지'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글쟁이로서, 그리고 은퇴자로서 자다르의 바다와 우물을 걷는 일은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는 과정이었다. 바다 오르간이 가르쳐준 것은 '비움'이었다. 파도가 들어올 빈 공간을 내어주어야만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는 것. 5개의 우물이 가르쳐준 것은 '준비'였다. 평화로울 때 미리 생명수를 모아두어야 위기의 순간을 견딜 수 있다는 것.

이제 우리 부부는 자다르의 올드타운 골목을 돌아 다시 숙소로 향한다. 많이 가지지 않아도, 거창한 계획이 없어도 괜찮다. 파도가 치면 노래를 부르고, 목이 마르면 우물을 찾으면 된다. 자다르의 바다와 우물이 수백 년 동안 그래왔듯이, 우리도 우리만의 속도로 이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은퇴 후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화음'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크로아티아#자다르#바다오르간#5개의우물#은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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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은퇴 부부의 여행과 삶

약 20년간의 안정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부부가 함께 은퇴 후 시작한 새로운 여정. 안정된 삶 대신 꿈을 선택한 40대 파이어족의 좌충우돌 '은퇴 후 삶'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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