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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아침 태극기 없이 텅빈 창가 ⓒ 김주환
3월 1일 아침, 달력을 보며 새삼스레 마음을 다잡았다. 1919년 그날의 뜨거웠던 함성을 기리는 3.1절. 으레 그래왔듯 창문을 열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아파트 단지 위로 따스한 봄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나의 시선은 이내 차갑게 얼어붙고 말았다.
'어떻게 단 한 집도 태극기를 달지 않았을까.'
수십 세대가 사는 아파트 동 전체를 훑어보고, 옆 동으로 시선을 돌려보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베란다 창틀마다 펄럭여야 할 태극기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차가운 유리창들만 아침 햇살을 튕겨내고 있었다. 텅 빈 창밖 풍경을 마주하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며 먹먹함이 밀려왔다.
내 어린 시절의 국경일 아침은 이렇지 않았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이 다가오면 학교 선생님들은 종례 시간마다 "내일은 국경일이니 아침 일찍 일어나 꼭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단순히 달라는 말만 하신 게 아니었다. 가운데 태극 문양이 품고 있는 조화의 의미, 모서리에 자리한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가 뜻하는 하늘과 땅, 물과 불의 의미를 칠판에 그려가며 가르쳐 주셨다. 경사스러운 날과 조의를 표하는 날의 게양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도 그때 꼼꼼히 배웠다. 뉴스에서도 전날 저녁부터 국기 게양을 독려하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고, 그것은 온 국민이 함께 치르는 당연하고도 경건한 의식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아버지와 함께 베란다 창틀에 태극기를 꽂고 나면, 왠지 모를 뿌듯함과 애국심이 작은 가슴에 차오르곤 했다.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들이 아파트 벽면을 수놓았던 그 장관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물론 시대가 변했다.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구조상 베란다 바깥에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기 어렵게 되어있는 곳도 많다. 팍팍하고 바쁜 일상에 치이다 보니, 빨간 날은 그저 '하루 쉬어가는 휴일'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과거처럼 국기 게양을 강박적으로 가르치거나 검사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주거 환경이 달라졌어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의 무게까지 가벼워진 것은 아닌지 두렵다. 베란다에 꽂힌 태극기는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을 위해 피 흘려 싸웠던 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기억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국기 게양함이 사라진 유리창 앞을 서성이며 나지막이 자문해 본다. 태극기가 사라진 빈자리에, 과연 그날의 의미를 기리는 마음마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 아래, 기억 속에서만 펄럭이는 태극기가 못내 서글프고 가슴 아픈 3.1절 아침이다. 내년 삼일절에는 조금 더 많은 창가에서 우리의 긍지가 다시 힘차게 펄럭이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