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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3 10:32최종 업데이트 26.03.03 10:32

순고협, 순천 고등학생들이 만든 단일 대오의 꿈

운동장을 점거한 열일곱살, 그 후

1989년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참교육 한마당’ 순천금당고 학우들이 노래 <참교육의 함성으로>에 맞춰 율동 공연을 했다
1989년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참교육 한마당’순천금당고 학우들이 노래 <참교육의 함성으로>에 맞춰 율동 공연을 했다 ⓒ 전교조순천지회

순천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1987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다. 6월 항쟁의 함성은 전국을 흔들었고, 그 울림은 전남 동부의 도시 순천에도 스며들었다. 광주와 인접한 이곳은 이미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생업과 학업으로 광주를 오가던 이들은 학살의 진실과 저항의 의미를 전해 들으며 자라났다.

87년 이후 순천에는 변화의 싹이 움텄다. 노동, 교육, 환경, 인권을 말하는 시민단체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1990년대로 접어들며 지역 현안을 중심으로 연대의 고리가 이어졌다. 더 이상 단순한 교육·교통의 중간 기착지가 아니었다. 순천은 서서히 '시민사회'라는 이름의 토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대학과 고등학교가 있었다. 순천대학으로 한 학생운동, 광주·목포와 연계된 활동, 그리고 1980년대 중후반 형성된 고등학생 운동의 경험자들이 이후 지역 사회운동의 주체로 성장하는 흐름. 역사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방향을 틀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억눌린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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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별할 것 없는 학생이었다. 성적이 뛰어난 편도 아니었다. 공업계를 생각했지만 색약 판정으로 인문계에 진학했다. 내가 다닌 순천금당고등학교는 순천 내 타 고등학교 보단 성적이 우수하지는 못한 학생이 입학 했지만 전남 동부지역의 상위권 학생들이 모이던, 입시 중심 학교였다. 우리 학교는 일명 '장학반'이라는 이름 아래 성적이 계급이 되던 곳이었다.

교복 자율화 세대라 불렸지만, 자율은 허상이었다. 브랜드 신발과 옷은 가정 형편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등굣길에는 학생주임과 선도부가 스쿨버스 하차 지점에서 두발과 복장을 단속했다. 구두를 입에 물게 하는 모욕, 머리를 즉석에서 자르는 폭력이 일상화 된 학교, 오전 7시 40분을 넘기면 운동장에서 엎드려뻗쳐와 체벌이 기다렸다.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 무거운 책가방과 도시락 두 개.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고등학생 소모임, 생각이 깨어나다

고2 후반 때, 광주에서 전학 온 친구를 따라 나간 모임. 그 가벼운 선택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나는 순천 민족민주청년회 산하 고등학생 독서모임 '한뿌리'에 합류했다. 순천고·순천여고·매산고·매산여고·순천여상고·효천고·금당고 학생들이 모인 소모임 이였다.

우리는 <민중의 함성>, <한국민중사>, <철학 에세이>, <다시 쓰는 현대사>를 읽었고 5·18 민중항쟁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가 침묵한 이야기들, TV가 외면한 진실들. 책은 우리를 흔들었고, 질문하게 만들었다. 2주마다 독서토론회를 열었고, 비정기적으로'통일학교'를 개최했다. 활동을 정리해 회지를 발간하고 각 학교에 배포했다.

개인적으로는 혼란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순응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연합 소모임이 이렇게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학생회장 선거, 좌절의 경험

고3이 되자 학교 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회 선생님은 민주화 운동을 말했고, 미술 선생님은 5·18을 그림과 노래로 전했다. 담임이던 세계사 선생님은 교과서 밖의 근현대사를 우리들에게 수업시간에 들려주었다. 그 배경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있었다. 그리고 학교 당국은 그들의 수업을 감시하였다.

학교는 학생회장을 전교생 직선제로 선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준비했다. 광주에서 전학온 친구가 학생회장으로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참교육 실현", "학생회 자치 활동 보장", "동아리 활동 보장", "야간자율학습 자율", "두발·복장 자율화." 전교조 지지 선언까지 담았다.

그러나 선거 공보물은 게시 30분 만에 훼손되었다. 우리들의 항의는 "어린 놈들 뭘 안다고 싸가지 없는 놈들" 이라고 욕설과 협박으로 돌아왔다. 결국 핵심 공약은 삭제된 채 선거가 치러졌다. 학교에 우호적인 후보가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직선제는 형식이었고, 권력은 여전히 교문 안 어딘가에 고여 있었다.

1989년 전교조 합법화 기금마련 활동 전교조 참교육 한마당에서 참교육 티셔츠 및 기념품 판매를 했다
1989년 전교조 합법화 기금마련 활동전교조 참교육 한마당에서 참교육 티셔츠 및 기념품 판매를 했다 ⓒ 전교조순천지회

학내 집회, 대가를 치르다

선거 이후에도 복장·두발 자율화, 야간 자율학습 폐지, 학생회·동아리 자치 보장 요구는 묵살되었다.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미술 선생님이 결국 해직되었다. 우리는 대자보를 붙였다. 모두 철거되었다. 나는 조사를 받고 경고를 받았다. 우린 결국 결심했다. 전교생이 모이는 애국조회 시간, 운동장을 무대로 삼기로. 학교에 납부해야 할 등록금 사비를 모아 현수막과 유인물을 만들었다.

애국조회 당일, 우리는 서로 어깨를 걸고 스크럼을 짜고 선생님들을 운동장 밖으로 밀쳐내고 '아침이슬'을 부르며 운동장을 장악했다. "참교육 쟁취", "자주적 학생회 활동 보장", "전교조 지지" 운동장은 우리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그 이후 두 달간 점심시간 집회가 이어졌다. 그리고 혹독한 대가가 따랐다. 전학 온 친구와 난 주동자가 지목되었고. 자퇴 강요. 부모 소환. 경찰 정보과 면담. 등 결국 나는 징계처분을 받고 한 달 가까이 격리되어 반성문을 쓰고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자퇴 요구는 한 달 동안 집요하게 요구 당했고 굴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분노가 컸다. 그 시점이 학력고사 100일전 이었다. 그 여름은 참 길었다.

전교조 합법화 국민대회, 그리고 순고협

1989년 여름.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 교사 복직을 촉구하는 집회가 순천대학교에서 열렸다. 정부는 전교조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해직을 단행한 상태였다. 전남 동부의 교사·시민·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학교와 교육 당국은 학생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원천 봉쇄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는 산길을 돌아 집회 현장에 합류했다. 천여 명의 고등학생이 함께했다. 집회가 끝난 뒤 시내 진출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다. 일부 학생들은 돌을 들었다. 억눌린 세대의 분노가 거리 위로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순천 지역 고등학생 대표자들이 모였다. '순천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건설 준비 위원회.'우리는 줄여서'순고협 건준위'라 불렀다.

학교의 징계와 감시, 협박과 좌절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억압 속에서 태어난 질문, 질문에서 시작된 연대, 연대에서 움튼 조직. 순천의 봄은 그렇게, 소리 없이 그러나 뜨겁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결실이 "순고협"이였다. 순고협 건준위 의장으로 나와 함께 투쟁했던 광주에서 전학 온 친구가 맡기로 했다.

단일 대오, 순고협

순고협 건준위가 만들어지자 우리의 개인 시간은 단숨에 사라졌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곧장 모임으로 향했고,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학생이면서 동시에 조직가로 살아가야 했던 날들이었다.

나는 순고협 건준위 사회부장을 맡았다. 흩어져 있던 순천 지역 고등학생 소모임을 묶어세우고, 타 지역 활동가들과 교류를 확대하는 일이 내 역할이었다. 각 학교를 돌며 얼굴을 익히고, 서로의 고민을 듣고, 작은 모임 하나라도 연결해 내는 일이 곧 우리의 운동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당시 순고협 건준위에는 대표성이 없었다. 각 학교 학생회장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이도 드물었다. 말 그대로 이름뿐인 협의회였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했다. 순고협이 제대로 출범하려면 무엇보다도 대표성 있는 단일대오를 만들어야 한다고.

기존 연합 소모임과의 연대도 중요했지만, 더 절박한 과제는 각 학교 안에 활동가를 발굴하는 것이 자주적인 학생회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순고협 건설만이 '참교육 실현'과 '자주적 학생회 쟁취'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학교마다 분위기와 역량의 차이가 컸고, 순고협을 바라보는 시각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적극적으로 함께했고, 어떤 이들은 거리를 두었다. 우리는 정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학우들에게 선전·홍보 사업을 벌였다. 각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고, 새벽마다 유인물을 배포하고, 교내에서 낙서 투쟁을 감행했다.

이런 실천에 동의하는 학교와 소모임은 앞장섰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한 발 물러섰다. 방관하는 모임도 있었다.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도, 같은 속도로 걸을 수는 없었다.

전교조를 바라보는 입장 차이도 컸다. 전교조를 중심으로 교육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주장과, 전교조 출범은 교원들의 교권 회복과 노동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 한계를 넘어 별도의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그 논쟁은 단순한 견해 차이를 넘어,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 복잡한 문제를 풀어갈 만큼 우리의 지도력과 정치력은 충분하지 않았다. 열정은 넘쳤지만 경험은 부족했고, 신념은 단단했지만 조율의 기술은 서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순고협 건준위는 순천·전남 동부 지역 고등학생 운동 전체를 포괄할 만큼의 영향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단일대오를 만들기 위한 발걸음 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각 학교에 소모임을 조직하고, 후배들을 설득하며, 자주적 학생회 건설을 위해 씨앗을 뿌려 나갔다.

1989년의 마지막 날까지 우리는 그 일을 붙들고 있었다. 고3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조직을 놓지 않았고,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간을 건너며, 나는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완성된 조직을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단일대오를 꿈꾸며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꿈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내 삶에 남았다.

1989년 해직 교사와의 만남 매산고·매산여고 학우들이 전교조 순천지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1989년 해직 교사와의 만남매산고·매산여고 학우들이 전교조 순천지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 전교조순천지회

순고협 출범, 재수 생활

순고협을 함께했던 동지들은 학력고사를 치른 뒤 대부분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나 역시 진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순고협 일을 곁에서 지켜내고, 후배들을 뒷받침할 사람이 필요했다. 논의 끝에 내가 그 역할을 맡기로 했다.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은 학생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서울로, 광주로 떠났다. 대학에 가지 못한 동지들 또한 재수를 위해 각자의 도시로 흩어졌다.

나 역시 거처를 광주로 옮겼다. 순고협 지원 사업과 대학 진학을 위한 재수 생활을 병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재수학원 등록은 3월. 그 전, 2월 말까지는 순천에 머물며 순고협 관련 사업을 정리하고 추진했다.

무엇보다 절실했던 것은'공간'이었다. 순고협이 정식으로 출범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활동 거점이 필요했다. 전교조에 도움을 요청해 사무실을 함께 사용할지, 아니면 제3의 공간을 마련할지 후배들과 머리를 맞댔다. 논의 끝에 순천대학교 내에 활동 공간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건준위 시절에는 순천대 총학생회 회의실을 간헐적으로 빌려 사용했지만, 이제는 '순고협'이라는 이름을 걸고 정식 사무실을 두고자 했다.

그러나 계획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순천대 총학생회에서 마련해주기로 한 공간은 대학 당국의 불허와 내부 사정으로 무산되었다. 대신 총학생회 형들의 도움을 얻어 우리는 학생회관 옥상에 가건물을 세우고 천막을 잇는 방식으로 '순고협 해방 공간'을 만들었다.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자리였지만, 그곳은 우리의 본부였고, 우리의 깃발이 꽂힌 자리였다.

순고협은 지역을 대표하는 고등학생 조직으로 서기 위해 각 학교 학생회장 선거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공동 공약을 만들고, 학우들에게 선전·홍보를 펼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 노력은 일정 부분 성과로 이어졌다. 효천고를 중심으로 매산고, 매산여고, 금당고에서 순고협을 지지하는 학생회장들이 당선되었고, 순천공고와 상고 등에서도 함께하겠다는 활동가들이 나타났다.

그해 5월, 마침내 순고협은 건준위라는 꼬리표를 떼고 순천지역을 대표하는 고등학생 대표자 협의회로 정식 출범했다. 작은 천막에서 시작한 우리의 외침이 지역을 울리는 조직으로 성장한 순간이었다.

순고협은 전교조와 함께 각 학교의 전교조 합법화와 참교육 실현을 위한 연합 행사를 기획하고 주도했다. 독자적인 행사를 하지 못했지만 전교조와 지역 시민사회 단체들 함께 '학생의 날' 기념했고 '해직 교사와 함께 하는 등반대회' 등 몇 가지 사업을 추진하였고 대표적인 사업으로는'참교육 T셔츠 입기 운동'과'참교육 기념품 판매'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학교의 탄압을 불러왔다. 판매에 참여한 학생들이 불법물 배포 협의로 교칙에 의해 처벌받는 일들이 발생 했다. 우리는 그 부당함에 맞서 싸웠다. 탄압은 거셌지만, 우리의 연대 또한 단단해졌다.

노래패와 풍물패가 결성되며 고등학생 소모임 활동도 점차 확대되었다. 문화는 투쟁의 숨결이 되었고, 노래와 장단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렇게 재수생의 삶과 고등학생 운동 지원 활동을 함께 짊어지고 1990년 한 해를 그렇게 보냈다.

새로운 조직과 논쟁들

순고협 활동이 강화되고 영역이 넓어지면서, 우리 앞에는 새로운 고민과 과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고민과 논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운동 노선'이었고, 또 하나는 활동가들의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진로 문제'였다.

당시 고등학생 운동은 대학생 운동의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순고협 사무실이 순천대학교 총학생회가 자리한 학생회관 옥상에 있다 보니 그 영향은 더 직접적이었다. 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과도 자주 만나면서 자연스레 운동 노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라는 정치적 노선이 우리가 하고 있는 고등학생 운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논쟁이 순고협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NL노선을 강조하는 활동가들은 "민족 모순이 계급 모순에 우선한다"는 인식 아래 민족문제와 통일운동, 자주·민족 중심의 이론을 강조했다. 반면 PD노선을 지향하는 활동가들은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을 바탕으로 노동자계급 중심의 변혁론을 강조했고,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었으며 노동운동과의 직접적 결합을 중시했다.

이 논쟁은 단지 이론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활동가들의 졸업 이후 진로 문제와도 맞물렸다. 일부는 대학으로 진학해 학생운동을 이어가려 했고, 또 일부는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노선은 삶의 선택과 직결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논쟁이 순고협 사업 집행에 순기능으로 작용하기보다, 오히려 조직 내부의 갈등을 키우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운동권 겉멋'에 빠진 활동가들도 나타났다. 현장에서 땀 흘리며 사업을 힘 있게 집행하기보다, 노선의 우위를 다투는 말싸움이 앞서는 일이 잦아졌다. 논쟁은 깊어졌지만, 조직은 조금씩 흔들렸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수많은 후배들과 치열하게 토론하고 밤늦도록 논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순고협 외곽에서 활동가들을 따로 묶어내어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진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탄생한 조직이 바로 '자주청년회'였다.

'자주'라는 이름은 NL 노선을 의미하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주적 학생회',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청년을 지향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자주청년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

자주청년회는 순고협 간부들을 제외하고 각 학교에 흩어져 있던 활동가들을 모아 체계적인 학습을 진행하는 모임이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 비롯한 철학·역사·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함께 읽고 토론했다. 시사 잡지 <말>지도 구입해 돌려 읽으며 사회 문제에 대한 감각을 키웠고, 순고협 사업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우리는 공부했고, 토론했고, 스스로를 단련하려 했다.

그러나 그 모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총무가 어느 날 모임 문서가 들어 있는 가방을 분실했다. 그 가방은 결국 순천경찰서 정보과로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주청년회가 내사 대상에 올랐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식은 순천대학교 총학생회 간부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당분간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심스러운 당부와 함께였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아마 그때가 학력고사를 한 달 남짓 남겨둔 시점이었을 것이다.

힘들고 슬프고 치열했던, 나의 사랑 고등학생 운동

나는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자주 청년회 모임을 그렇게밖에 정리할 수 없었던 나의 무책임함이, 무엇보다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오래도록 후회했고, 괴로웠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다시 학력고사를 치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 후 어렵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돌이켜보면 그해의 나는 학생이면서도 활동가였고, 재수생이면서도 조직의 한 축이었다. 흔들리면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았던 시간. 그 시간은 내 청춘의 가장 거칠고도 빛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89년, 1990년 참교육 X세대 그리고 전교조, 힘들고 슬프고 치열했던 그 시절. 좌절했다가도 다시 일어서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모으고, 길을 찾던 시간이었다. 전교조와 함께 참교육운동을 했던 것은, 그것이 이 땅의 억압과 굴종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운동 속에서 분단의 아픔과 비극, 5·18정신이 무엇인지, 참된 인권이 차별과 평등이 무엇인지, 참된 삶이 무엇인지 베웠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었고, 삶을 견디는 지혜를 배웠다.

지금도 그때 읽었던 책들, 밤을 새워가며 나눴던 논쟁들은 내 인생의 큰 좌표로 남아 있다. 그 좌표는 여전히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길, 가장 사람다운 길을 선택하려 애쓰고 있다.

그 당시도 지금도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온 동지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 보단 조직과 운동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동지들이 있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내 이야기가 아니다.
그 시절을 함께 건너온 동지들과 후배들의 이야기다.
그들에게 미안함과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2023년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윤석열 정부 1년 평가’ 기자회견 기자회견에 참여해서 발언 중인 저자 김철중
2023년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윤석열 정부 1년 평가’ 기자회견기자회견에 참여해서 발언 중인 저자 김철중 ⓒ 공공운수노조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철중님은 1989년 고운시절 순천금당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하며 순천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건설준비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졸업이후에도 순천지역 고등학교 자주적 학생회 건설과 참교육 실현을 위해 힘썼으며, 이후 2018년 민주노총 정책국장, 2023년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한 노동조합 활동가입니다.


#고운#고등학생운동#고등학생운동사#순천고협#전교조순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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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현대사에서 지워진 역사

1980-1990년 뜨겁게 타올랐던 고운(고등학생운동)을 기록하고 사회적 의미화와 평가를 통해 비판적 유산으로 만들며 지금 여기에서 변혁과 연대를 이어가기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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