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먹고 못 입고 아끼면서 남을 위해 살아오신 엄마의 총기와 자애로움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절약의 여왕, 따뜻함의 대명사인 엄마와의 지난 설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손주를 위한 세뱃돈 봉투구순 노인이 손주들을 위해 준비한 재활용 세뱃돈 봉투와 그 위에 적은 감동의 문구들 ⓒ 윤태정
제사상을 물리고 나니 아버지의 빈자리가 보였다. 설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엄마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세배를 받으셨다. 세배를 마친 우리는 으레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덕담을 들었다. 아버지의 덕담은 좀체 끝날 줄 모르는 연설문이나 설교에 가까웠다. 삼국유사부터 근현대사까지 훑고 나서야 겨우 가족사로 넘어왔다. 시작은 산뜻했으나 지루하고 긴 시간이 흘렀다.
우리 오남매는 새해 첫날부터 애국을 생각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뒤이어 조상을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해야 했다. 무릎에 쥐가 날 때쯤 엄마가 눈을 껌벅이면서 아버지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만하시라는 신호였으나 아버지는 끄떡도 하지 않고 길게 이어가셨다.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세뱃돈에 관심을 둔 아이들의 눈초리에 힘이 빠져갈 무렵, 아버지도 힘든지 슬그머니 마무리 지으셨다. 엄마는 손주들에게 세뱃돈을 나눠주면서 조용히 웃으셨다.
"얘들아, 세뱃돈 받기 참 힘들다, 그치?"
짧게 끝난 엄마의 덕담 그리고 세뱃돈
그 고지식했던 아버지가 떠난 그 자리에 올해는 엄마가 앉으셨다. 세배하는 손자 손녀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이 92세의 노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해맑았다. 절을 끝낸 우리는 마치 집안의 오래된 전통인 양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의 덕담은 아버지의 긴 연설문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간결하고 짧아 싱거울 정도였다.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라."
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건 오로지 이 두 가지뿐이라는 듯, 명쾌하고 강렬했다. 예전에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엄마도 두툼한 지갑을 들고 계셨다. 엄마가 지갑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사회인이 된 조카들이 하나둘 벌떡 일어나서 엄마께 봉투를 드렸다. 명절을 맞아 웃어른께 용돈을 드릴 줄 아는 품성으로 잘 자란 조카들이 대견스러웠다. 언제나 받기보다 주는 기쁨에 익숙한 엄마는 멋쩍은 표정으로 손주들의 봉투를 받으셨다.
우리 집안은 내가 장녀이고 밑으로 여동생 셋과 막내 남동생이 있다. 넷째 딸은 미국 시민이 된 지 오래 되어 이 자리에 없었다. 아홉 명의 손자 손녀는 모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장을 위해 꿈꾸고 있다. 어느새 이렇게 듬직하게 자라 이 나라 곳곳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뿌듯했다.
드디어 엄마의 지갑에서 세뱃돈 봉투가 나올 순서였다. 봉투를 꺼내며 중얼거리는 엄마의 혼잣말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라면 많이 준비하셨을 텐데, 나는 얼마 못 줘."
쑥스러운 듯 봉투를 내미는 엄마의 손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새 봉투가 아닌 누구한텐가 받은 구겨진 봉투, 은행 로고가 찍힌 봉투 등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봉투를 재활용하다니 엄마는 역시 '절약의 달인'다웠다.
한자 공부할 때 쓰시라고 새 공책을 사다 드려도 달력 뒷면이나 여백을 활용하는 분이 아닌가. 엄마한테 새것이란 절대 쓰지 못할 보물과도 같은 가치를 지닌다. 환경보호 차원에서 하찮은 것이라도 아껴야 직성이 풀리는 분한테 나라에서 '절약상'이라도 내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린 친손자, 손녀가 받은 봉투는 특별해 보이길래 궁금해서 여쭈어봤다. 데이케어센터에서 돌봄 차를 운전해주시는 분이 만든 건데 두 개를 엄마한테만 몰래 주신 거라고 했다. 엄마도 센터에 갈 때마다 선생님에게 뭔가를 몰래 갖다 드리곤 했으니 그 보답이었던 셈이다.
자식, 손자들에게 맞춤형 편지까지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봉투 겉면에 적힌 글귀였다. 아들이 받은 봉투 겉을 슬쩍 보니 낯익은 엄마의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받은 봉투마다 다 다른 문구가 쓰여 있었다. 손주들을 위해 상황에 따라 다른 맞춤형 '예언서'이자 할머니 사랑을 표현한 짧은 편지였다.
"와, 엄마는 손주들한테 세뱃돈에다 맞춤형 편지까지 써주셨네요."
나는 엄마의 새해 덕담을 오래도록 기억하자는 뜻에서 봉투를 한데 모아 사진으로 남겼다. 엄마의 짧은 편지 안에 담긴 손자 손녀를 향한 지극한 마음을 읽었다. 어찌나 손주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계신지 정말 놀라웠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엄마의 총기와 자애로움을 기록해둘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엄마가 손자 손녀에게 주는 세뱃돈 봉투에 써주신 사랑의 짧은 편지
*큰딸네
-아들: "꼭 장가가고 첫째 행복이다." (결혼 안 한 공무원)
-딸: "타지에서 밥 잘 챙겨먹고 건강하고 행복해라."(캐나다에서 공부함)
*둘째 딸네
-아들: "어려워도 참고 조금만 견뎌내라."(코딩회사 사원)
-큰딸: "출산 잘하고 즐겁게 지내라."(출산을 앞둠)
-작은딸: "배필을 잘 만났구나,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라."(결혼을 앞둠)
*셋째 딸네
-아들: "앞길 잘 닦으며 살아라. 건강 챙기고 편안하게 지내."(약국 경영함)
-딸: "열심히 노력해줘서 고맙다, 고마워."(대기업 사원)
*막내아들네
-아들: "을사년도 행복해라." (대학 1학년)
-딸: "올해도 무탈 건강하고 진학을 축하한다."(예비 고3)
엄마는 캐나다에 있는 내 딸에게도 세뱃돈을 준비하셨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할머니 손에 자랐기에 그 사랑은 유난히 넘쳐난다. 자나 깨나 손자의 결혼을 바라며 좋은 짝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분의 원대로 좋은 인연이 나타난다면 좋으련만. 오늘도 엄마는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하시던 말씀을 하셨다.
"효도란 다른 거 없어. 부모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이 최고여."
앞으로 우리 오남매의 할 일은 똘똘 뭉쳐서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거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서로 화기애애한 모습만 보여드려 엄마를 외롭지 않도록 해드려야 한다. 형제의 우애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엄마의 소원에 금이 가지 않도록 마음가짐을 더욱 단단히 해야겠다.
나는 슬그머니 엄마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았다. 험난한 인생살이로 손가락 마디가 투박했으나 자식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은 절절히 끓어올랐다. 내년에도 이 손으로 세뱃돈 봉투마다 손주 손녀를 위한 맞춤형 문장 하나씩 적어주실 수 있기를 바랐다. 엄마가 올해같은 설날 아침 풍경을 몇 해만 더 누리실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엄마의 공부 모습한자 공부하실 때 공책 대신 달력 뒷면이나 이면지를 활용하며 '절약'을 실천하시는 엄마 ⓒ 윤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