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학생들이 혈서로 북진을 호소한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만인 1954년 6월 25일, 무심천광장에서는 청주시 주최로 '멸공 기념대회'가 열렸다. 다음 해에는 청주시 각 애국단체가 무심천광장에서 '일본 용공정책 분쇄 국민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관제데모의 일상화

▲1959년 김일환 내무부 장관이 주도한 대통령 선거 대책회의 ⓒ 충청북도
1950년대 반공 문화는 1959년에 극점을 이루었다.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일본 정부 간에 진행된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이 실행된 해였기 때문이다. 북송사업은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해외 추방을 바라던 일본의 이해와 북한의 노동력 부족이 맞물려 추진된 정책이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약 9만 3000명의 재일조선인이 임차한 귀환선과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갔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재일조선인 북송을 준선전포고로 간주한다는 통보까지 보내며 북송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학생과 시민을 동원한 관제 시위가 전국을 강타했다. 충북에서는 1959년 2월 13일부터 26일까지 청주공고, 무심천광장을 비롯한 곳곳에서 총 779회, 연인원 81만여 명이 참가하는 집회를 열었다.
1950년대는 관제 데모가 일상화된 시대였다. 휴전협정 반대 운동, 미군 철수 반대 시위, 중립감시위원단 철수 데모, 재일조선인 북송 반대 시위 등이 그것이다. 청주 시내 곳곳에는 '붉은 간첩 잡아내어 간첩 침략 막아내자'라는 입간판이 세워졌다.
이러한 표면적인 반공 문화와 더불어 국민의 일상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구축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유가족들과 의용군으로 행방불명된 자, 인민군 점령 시절의 부역자 및 그 가족들을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연좌제로 경제적·정신적 피해를 가했다. 일선 경찰서 단위에서는 '관찰보호자카드'를 작성해 월 1~2회 대상자를 감시했다.
관찰보호자카드는 가옥의 평면도와 도주 예상도를 그리고 관찰 대상자의 가계도를 작성하는 등 철저함을 보였다. 이 카드는 1970년에 전국 171개 경찰서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한민국을 전체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관권선거를 위한 체제 정비
이승만이 85세가 되는 해인 1960년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는 해였다. 이승만은 4사5입 개헌을 통해 1956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노욕은 끝이 없었다. 네 번째 대통령을 위해 1960년 3·15 선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59년 5월 20일, 환영 대회 참석 후 속리산에서 일박한 이승만 대통령. ⓒ 충청북도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3월부터 구체적인 정·부통령 선거 대책을 세웠다. 3월에 5부 장관을 경질하고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했는데, 특히 선거 주무 장관인 내무부 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했다. 같은 달에 내무부·외무부·재무부·법무부·교통부·체신부 장관으로 구성된 '6인 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 기구는 대통령 특명 사항과 공무원 선거 대책 등을 처리하는 '내각 속의 내각'이었다.
특히 최인규는 자유당 내에서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최후로 써먹을 총알'이라는 말이 오갈 만큼 역할이 기대되던 인물이었다. 또 <동아일보>가 "자유당 내의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다만 경무대와 이의장(이기붕) 에게만 충성을 바쳤다"고 평할 만큼 이승만에게는 더 없는 충복이었다.
최인규는 이승만의 기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했다. 그는 취임사에서부터 "공무원은 누구나 국가원수인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차기 선거에서는 이 박사와 이 의장을 정·부통령으로 꼭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라"고 말하며 공무원의 선거 개입을 공개적으로 독려했다.
곧이어 그는 35세의 서울시경 국장 이강학을 치안국장에 임명하고, 각 도 경찰국장도 교체했으며, 이어 총경급 대규모 인사를 대폭적으로 단행했다. 5월에는 7개 도지사를 교체하며 선거 체제에 돌입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2008).
충청북도와 충청북도경찰국의 체제도 정비되었다. 1959년 새해에 이기영 충남 문교사회국장이 충청북도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에는 문학동 경무관이 충청북도경찰국장으로 부임했다.
곧이어 총경급과 경감·서장급 경찰 간부의 대폭 이동이 단행되었다. 충북 경찰국 사찰과장(현 정보과장)에 김상기 총경이 전보되어 왔다. 당시 도경 사찰과장은 정·부통령 선거 업무에 깊숙이 관여하던 직책이었다.
선거 사무를 전담했던 부서는 내무국 지도과였는데 박상진 과장이 2년 전부터 보임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상기 사찰과장과 박상진 지도과장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말 조선총독부 시행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한 인물이었다(이승우, <도정반세기>, 1996).
부정선거를 위한 체제 정비와 더불어 관권선거 계획에 착수했다. 1959년 6월 중순에는 각 경찰서 사찰계장, 지서장·파출소장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1960년 1월 25일 최인규 내무부 장관이 충북도청 회의실에 각 시장·군수와 도청 간부 직원들을 모아놓고, 3·15 정·부통령 선거 압승을 채찍질하는 강도 높은 훈시를 했다.
3·15 정·부통령 선거 1년 전부터 지역개발 공약이 남발되기도 했다. 충북선 충주~제천 간 연장공사 개통식, 충주비료공장 준공식, 조령·이화령 도로 확장공사 기공식, 청주 시공관 낙성식, 목행교 준공식 등 당시로서는 제법 굵직했던 대형 공사 현장에서 관권 개입의 냄새가 풍기는 사전 선거운동 양상이 벌어졌다.
"조원의 번호표를 일괄 제시하라"
선거가 임박하면서 충청북도와 충청북도경찰국의 사전 부정투표 지시는 체계화되었다.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인택 충북도지사는 2차에 걸쳐 시장·군수 회의를 개최해 "3.15 선거에 있어서 대한 반공 지도자이며 애국자이신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에 양심적인 정치가이며 이 박사를 잘 보필할 수 있는 이기붕씨를 부통령에 기필코 당선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 문학동 경찰국장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 일선 경찰서에 구체적인 부정선거운동 방법을 지시했다. 즉 사전 4할 투입, 3인조·9인조 공개투표, 자유당 완장 착용, 투표 종료 후 민주당 참관인 축출, 개표 허위발표 등이다(<충북신보> 1960.7.13).
위와 같은 행정기관과 경찰기관을 통한 부정선거운동 지시는 각 시·군을 통해 말단 행정기관인 동·읍·면까지 하달되었다. 청주에서는 1960년 3월 9일 오후 7시를 기해 청주 시내 36개 동의 부흥친목회(통반장 및 자유당 유지들로 구성된 단체)를 각 동별로 일제히 개최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찰 참석하에 청주 시내 통반장 회의 개최 ⓒ 동아일보 1960.3.11
이 모임은 경찰관이 입회한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3인조 공개투표를 포함한 부정선거 실시 방법에 대한 지시가 이루어졌다. 1960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이다.
- 조장은 선거 당일 오전 5시 30분까지 지정된 장소에 집합할 것.
- 조장은 2명의 조원을 인솔하고 투표장에 임하여 3명의 번호표를 일괄 제시하고 투표용지의 교부를 받은 후 투표소에 입장할 것.
부흥회는 동리별 부흥회 외에도 '공무원 부흥회', '경찰 사찰요원 부흥회', '자유당원 부흥회' 등으로 구분되어 조직되고, 이의 총지휘는 경찰 사찰계에서 담당했다. 부흥회원들은 3인조 투표의 조장으로 임명되어 부정투표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또한 직장에는 직원 중에서 포섭한 사찰요원이 자유당의 선전 역할을 도맡아 했으며 부정선거에도 개입했다. 경찰기관의 프락치 역할을 한 사찰 요원은 직장과 공무원, 마을 단위로도 조직되었다. 사찰 요원은 선거 당일 완장을 차고 투표소 주위에서 유권자들을 감시하고 공개투표를 종용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역에서의 4월혁명>, 2010).
즉 부흥회와 사찰 요원이 경찰서 사찰계의 통제하에 부정선거운동의 일선 집행을 맡은 것이다. 이처럼 사전 부정투표 교육과 지시는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헌병이 교통정리 맡아
부정선거에는 반공청년단을 포함한 우익 청년단도 깊숙이 개입되었다. 반공청년단 충북도단부는 1959년 9월 16일 현대극장에서 결단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1960년 3월 7일 자유당 유세 때 이승만 박사·이기붕 의장을 지지하는 혈서를 쓰기도 하고, 자유당의 부정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반공청년단 충북도단부 단장은 송경섭, 부단장은 홍정흠·박명섭, 반공부장은 최병준, 조직부장은 박학래, 훈련부장은 김종호였다.
투표 당일에는 경찰들이 부정 투·개표 현장에 동원되었고, 청주 시내 교통정리는 헌병이 맡아 강압적인 선거 분위기를 조성했다. 또한 충주에서는 일부 군인들이 3월 15일 오전 0시 트럭 4대에 분승해 군가를 부르며 관제시위를 하기도 했다.
오전 7시부터 시작된 투표에서는 모든 투표구마다 자유당 운동원들이 완장을 차고 부정투표를 독려했으며, 민주당 참관인들은 대부분 투표소에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
3인조·9인조 공개투표가 강행되었으며 일부에서는 대리투표도 이루어졌다. 투표 당일 아침 8시경 청원군 오창면 제2투표소에서는 민주당 참관인 신근규씨가 공개투표에 항의해 투표용지 58매를 찢어버려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긴급 구속되었다. 청주 시내의 선거 풍경에 대해 <한국일보> 3월 16일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투표날인 15일 청주 시내에서는 새벽 5시 또는 5시 30분에 자유당이 각 동별로 유권자들을 각각 지정한 장소에 집합시켜 3인조, 9인조로 편성(공무원과 공무원 가족은 별도 조직)한 다음 투표가 시작된 7시 투표소 문이 열리자마자 조별로 질서정연하게 투표소로 들어갔다.
시내 사직동 제1투표구에서 투표하고 나온 사람은 투표용지를 조장에게 보이고 넣었다고 말하였다. 특히 어떤 조장은 자기조의 번호표를 회수해서 투표용지를 받아 일괄해서 조장이 기표하여 집어넣기도 하였다."
4할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에 이어 개표 현장에도 불법이 판을 쳤다. 청주에서는 오후 5시에 투표를 마치고 청주중학교 강당에서 오후 10시경부터 개표에 들어갔다. 일반인과 취재기자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청원군은 군청에서 개표를 진행했는데, <충북신보>와 <조선일보> 기자 2명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전국적인 부정 투·개표는 민주당의 선거 무효 선언을 야기했으며, 청주에서도 3월 16일 오전 1시 민주당 이민우 청주시의원이 참관을 포기하고 퇴장했다.
부정투표 용지에 대한 소각도 이루어졌다. 청주농고 3학년 4반 담임이었던 이상록 교사는 3월 15일 숙직을 했다. 그는 다음 날 새벽 1시경 공동묘지 쪽에서 커다란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고 날이 새기 전에 현장에 가보았다. 그곳에서 투표용지를 태운 흔적을 발견했다. 부정 투·개표가 판을 친 선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