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자의 머리와 함께>, 1991. ⓒ 전사랑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데미이언 허스트
특히나, 현대인들에게는 더없이 그렇다. 죽음이 우리 일상 속에 있지만, 죽음은 우리 일상에서 삭제되고 격리된 채, 진공 포장된 상태로 우리 앞에 도달한다.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소고기를 먹지만, 정작 잘린 소의 머리는 본 적이 없다. '해충'이라며 가차 없이 파리와 모기를 때려 잡지만, 그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아래 허스트)의 작품을 보기 전까진.

▲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 아래 인물들에 대한 세 가지 연구>, 1944. ⓒ 전혜빈
"왜 내 작품이 불쾌하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한다면요."
허스트가 영향을 받은 작가로 꼽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말이다. 허스트는 회화에서 조각으로 방향을 튼 이유에 대해, "베이컨의 회화가 나를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고 고백했다.
베이컨이 인간을 뒤틀린 형체, 짐승같은 이미지로 그려냈다면 허스트는 1990년대 할 수 있었던 과학적, 물리적 환경을 총동원해 동물을 가져와 인간을 드러낸다.
윤리, 종교, 그 모든 것 위의 예술
허스트가 만연하게 자행되고 있는 인간에 의한 동물의 살생을 자각시키기 위해 이런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베이컨의 말처럼 그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을 예술에 끌어들였을 뿐이다.

▲<천년> , 1990. ⓒ 전사랑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자문해 본다. 왜 죽음을 전시했는가? 죽음뿐만이 아니다. 그의 예술이 전례 없이 잔인한 이유는 죽음이 벌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게 하는 데 있다. 동물의 사체로 인한 파리떼의 축제의 현장. 그 축제의 현장 속 전기 충격기로 인해 벌어지는 파리의 가차 없는 죽음. 아마 미술사에서 이토록 잔인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천년>을 언급하며 허스트는 말한다. "살충기로 날아가서 죽어버리는 파리, 잠시 후 아무 의지도 없는 그것은 신이 완전히 떠나버린 껍데기로 변해버립니다." <천년> 앞에서 관객은 파리의 생과 사를 목격한다. 적어도 그 작품 앞에서 신의 위치에 서서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과 사도 파리와 다를까?
그는 2008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서 출발한다"며, 사람을 통째로 잘라서 전시할 수는 없기에 인체로 할 수 없는 작업을 동물로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집 <내가 만난 데미언 허스트>에서도 그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폭력적인 개입"을 통해 대상을 죽임으로써 내부를 봐야 한다고 했다.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질문에서는 "진지하게 고민 중"이며, "중요한 이슈임을 알고 있다"라고 잘라 말하면서도 포름알데히드에 넣고 싶은 것이 더 있느냐는 질문에는 "반으로 잘린 남녀의 성교하는 모습"이라고 우스개 소리로 답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에게 일반적인 윤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 허스트의 작품에서 인간은 특별히 동물 위에 있지 않다. 프랜시스 베이컨도 그러했지만 허스트에게도 인간은 전시장에 있는 동물들의 살덩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허스트가 말로만 인간도 전시하고 싶다고 한 게 아니다. 이미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도 실제 인간의 해골이다. 그의 전시에서 인간의 죽음은 이미 사용된 셈이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 2007., <신의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묵상하며>, 2008. ⓒ 전사랑

▲<신의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묵상하며> 세부. ⓒ 전사랑
허스트에게는 윤리, 종교 그 모든 것 위에 예술이 있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 있었지만 12살 때 그 믿음을 예술로 바꿨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 <신의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묵상하며>는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삼면화로 제작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은 나비로 만들었다. 멀리서 숭고해 보이는 것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명의 죽음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 <신의 사랑을 위하여>가 자리한다. 아마 가장 화려한 죽음을 상징하는 작품이 아닐까. 죽음 앞에선 어떤 욕망도 부도 덧없다.
전시된 죽음, 죽음을 탐구하다
관객을 향해 입을 벌리고 공포감을 주는 최고의 포식자 상어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상어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 그러하다. 왜 그는 죽음을 전시하고, 관객을 죽음 앞에 끌어들이는가? 죽음을 인식해야 생명도, 삶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1991. ⓒ 전사랑
허스트의 작품에 사용된 동물을 보고 나서야, 전시에 매고 간 매끈한 소가죽 가방 가죽이 품고 있었던 생명이 그제야 '인식'된다. 아이들과 함께 간 아쿠아리움에서 마주친 상어와 돌고래를 보면서도 허스트의 상어가 떠오른다. '산 채로 전시되는 게 죽어서 전시되는 것보다 나을까'를 생각하며 '전시된 생명'은 진정한 생명인가를 묻게 된다.
그의 목적은 죽음을 전시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애써 죽음을 외면하려는 인간의 방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미술사 속 수많은 작품에서 이보다 강력한 메멘토 모리를 발견한 적은 없다.
약장 시리즈는 현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현대적 고찰을 담아낸 작품이다. 멀리서 보면 회화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 설치작업 <무한을 위한 원형>(1998)은 약의 반복과 배열을 통해 하나의 회화적 이미지를 구성한다.
할머니의 약장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 약에 대한 신봉을 여지없이 드러낸 작품이다. 영원을 염원하는 인간의 본능,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봉은 신선한 식품보다 알약하나를 더 신뢰하게 만들었다. 알약들로 가득 찬 <무한을 위한 원형>은 마치 약, 영양제로 가득 찬 우리의 몸 같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무한을 위한 원형>, 1998. ⓒ 전사랑

▲<무한을 위한 원형> 작품 세부 ⓒ 전사랑
인류의 역사에서 몸이 아프거나 장애가 있으면 '신의 저주를 받았다'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기도와 회개가 현생을, 죽음 이후의 삶을 더 편안하게 해 줄 것이라 믿었다. 현재 우리는 죄를 뉘우치는 대신 영양제를 먼저 찾는다. 좋은 식품 섭취하고 운동하는 것보다, 영양제와 알약이 '아픈 상태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 믿는다. 의학은 현대의 종교이고 약은 치료의 도구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의 표식이다.
1990년 영국 마거릿 대처 시대 예술가에 대한 공공지원이 축소되자 예술가들은 시장에 편입되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 위해선 무슨 짓이건 한다"는 허스트의 과감함과 치기 발랄함, 흐릿한 동물에 대한 윤리적 규범,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1943~)라는 거대한 자본가는 허스트라는 브랜드와 YBA(Young British Artists) 신화를 만들어냈다.
허스트를 비롯한 YBA 작가들이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다. 데이비드 홉킨스는 이들을 "1950/60년대 아이디어들을 재활용"했으며 "시대착오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확실히 허스트가 사용하고 있는 기법이나 매체가 현대적이지, 그의 예술이 던지고 있는 물음들이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여기에 더해 작품 제작 연도를 잘못 기재한다던가, 자신의 작품을 다시 사들여 시장 가격을 의도적으로 높이는 등의 행동은 작가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미술사에서 '데이미언 허스트'는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의 예술은 과거 예술가들이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죽음과 유한성에 대한 문제를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대면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죽음을 사유의 영역이 아닌 경험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이는 대량생산과 소비 속에서 은폐된 죽음, 그리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개인의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까지 이어진다.
'논란의 작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
1990년대 '한물간' 혹은 '소진된' 작가의 전시를 국립 미술관에서 굳이 개최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있다. 허스트의 전시를 서울에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러한 평가가 납득되기도 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해골이나 포름알데히드 속 상어, 잘린 소의 머리는 이미 현대미술사에서 반복 소비된 이미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시전경 ⓒ 전사랑
그러나 전시를 본 후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평일 관람 시간 전부터 이어지는 긴 대기 줄, 전시를 본 뒤 예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관람객들의 모습, 단순한 '전시 인증샷'이 아니라, 작품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다양한 반응으로 채워진 SNS 관람평. 이 모든 반응은 그의 작업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착 꽃>, 2019. ⓒ 전사랑
'개인전'으로 칭하고 있는 전시지만 회고전 같은 분위기를 띄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전성기'는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허스트는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과 '한 줄 평'을 자극하는 작가다. 허스트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전시를 보고 나면 한 마디라도 하고 싶은 그런 전시를 만드는, 그가 갈구했던 대로, 한번 보면 '기억되는 작가'.
논란과 비판이 무성한 허스트이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의 설치 작업이 현대미술사에서 계속 회자될 것이라는 것. 영국 현지 미술 비평가들에게도 논쟁적 평가를 받고 있는 허스트이지만, 그는 '논란의 작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거라면 무슨 짓이든 할 '데미언 허스트'니까.
논란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작품이 관람객에게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뜻이다.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라는 전시의 제목처럼, 이 전시는 하나의 해석이나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에서부터 현대미술의 경험은 시작된다.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월 28일까지, 일반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