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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비가 예보된 상태라 신경이 쓰였다.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 신청을 마치고 걷는 당일, 비가 내린다는 소식에 참여를 해야 될지 고민이 되었던 것. 주관부서에서는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어떤 조건에서도 빠짐없이 진행한다는 것을 이미 고지한 상태라, 참여 여부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안으로 지리산둘레길 전 구간을 걸어 보기로 한 이상, 비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우의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조치를 취했다.

▲지리산둘레길지리산둘레길 장항~운봉 구간을 걷는 일행. ⓒ 정도길
지난 4월 4일, 기상예보대로 아침부터 비는 내렸다. 집결지인 남원시 운봉에 도착하고 참여한 일행 22명은 출발지인 장항마을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이날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는 장항~운봉 구간으로, 장항마을, 배너미재, 수성대, 중군마을, 구인월교, 월평마을, 흥부골자연휴양림, 군화동, 비전마을, 신기마을, 북천마을 그리고 서림공원까지 이어지는 약 16.8km 구간이다.
지리산 천왕봉을 볼 수 있는 장항마을 당산 소나무 터, 람천 벚꽃 길을 걸으며 보는 지리산 서북능선 그리고 동편제 마을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서림공원에 이르는 구간이다.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장항교 앞, 비가 내리는 데도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는 빠짐없이 진행되고 있다. ⓒ 정도길
오전 9시 55분, 많은 비는 아니지만 계속 내리는 비로 우산과 색깔 진한 우의를 입고 다리를 건너는 풍경이 마치 아이들 소풍가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장항마을은 북쪽으로 높고 듬직한 앳골로, 노루가 목을 길게 내민 형상 때문에 생긴, 노루목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노루목에 당산을 모신 것은 북풍이 마을로 넘어오는 길목에 당산을 세워 허함을 막고 복을 가두는 의미란다. 지금도 매년 정월 초사흗날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노루목 당산 소나무장항마을 뒤 노루목 당산 소나무. 매년 정월 초사흗날 제를 지낸다. ⓒ 정도길
고갯길을 오르니 숨이 차 좀 쉬어가기로 한다. 우의를 입은 탓에 온 몸은 땀과 습기가 범벅이 돼 갑갑함이 넘친다. 때마침 비는 가랑비로 변해 무거운 우의를 벗으니 걸음걸이는 한결 수월하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배너미재다. 이 재는 장항마을과 중군마을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 전설에 따르면 운봉지역이 호수였을 때 배가 넘나들었던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비를 머금은 진달래가 애처로운 모습이다. 계속되는 숲길을 따라 계곡에 이르니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다. 간밤에 많은 비가 내린 탓에 물이 많이 불어난 상황이다. 참여자 한 명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수난(?)을 겪었다.

▲불어난 물간밤에 내린 비로 계곡은 많은 물이 불어난 모습이다. ⓒ 정도길
비 내리는 날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
숲길에서 큰 길로 나오니 시멘트 포장길은 백련사로 갈라지는 갈림길이다. 산 정상부는 짙은 운무로, 그친 비는 산야의 풍경을 한층 아름답게 화장을 시켜 놓았다. 숲 속에 자리한 선화사는 고요함과 적막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절 마당에 피어난 백목련과 벚꽃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지리산의 봄 풍경을 만끽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시간 상 경내를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 그 마음은 다음 기회에 찾아 달래야겠다.

▲선화사산 솦 깊은 곳에 자리한 선화사에 목련과 벚꽃이 활짝 피었다. ⓒ 정도길
길 아래로 보이는 집 몇 채가 눈길을 끈다. 통나무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반으로 쪼개 지붕을 덮은 집이다. 강원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널판 형태의 너와집과는 달라 보인다. 자연친화 형태의 숙박시설로 보이는 이런 곳에서 하룻밤 지내면 힐링이 되겠다는 생각이다.
낮 12시 5분, 걸은 지 2시간 10분 만에 중군마을에 도착했다. 중군마을은 지리산 북부로 가는 길목에 위치, 삼한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였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군사 조직으로 전군, 중군 그리고 후군이 있었는데, 중군이 주둔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중군마을에서는 지리산권 에코빌리지 조성사업이 한창이다. 현재 민박과 체험장 운영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중군마을에서 인월면 소재지인 구인월교까지는 약 2.0km 거리로 람천을 따라 강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이다.

▲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점심 식사 후 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에서 잠시 휴식을 가졌다. ⓒ 정도길
토요걷기 때마다 점심은 대부분 도시락으로 준비하는데, 이날은 면내 식당 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에서 차 한 잔 마시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달오름 마을로 불리는 월평마을은 고즈넉한 분위기다. 크리켕의 기점이기도 한 월평마을은 민박과 농촌전통체험 프로그램 이용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마을마다 숨겨진 이름의 의미
숲길에서 가녀린 야생화를 만났다. 솔잎을 이부자리 삼고 혹독했던 지난겨울을 이겨내고 새 생명을 틔웠다. 누군가 물으니, 나를 보려면 고개를 숙여야 된다는 남산제비꽃이란다. 고개를 숙이고도 이마를 땅에 대야만 겨우 인사를 건넸다. 자태를 뽐내고 튕긴 이유가 있었다. 꽃말은 여러 가지로, 그 중에서 '풋향기 나는 가인'이 제일 마음에 든다. 생각나는 대로 시 한 수를 읊었다.

▲남산제비꽃남산제비꽃 꽃말은 풋향기 나는 가인이다. ⓒ 정도길
남산 제비꽃
그렇게 걷고 싶었던 지리산둘레길
그 숲길에서 여린 들꽃을 만났다
솔잎을 이부자리 삼고
추운 겨울을 버텨 낸 고고함으로
교양 넘치는 자태를 뽐내며
잎사귀 살짝 흔들며 나를 반기네
엎드려만 얼굴을 보여준단다
품위 넘치는 가인이라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야만 했다
그래도 올려다봐야 겨우 실체를 드러내는
옅은 미소만 보여줄 뿐이다
봄바람이 분다
뿜어내는 풋향기에 혼을 뺏기고
품위 넘치는 자태에 넋을 잃고
옅은 목소에 얼이 나가는
그대는 남쪽 산언저리에 터 잡은
소박하게 드러내는 남산 제비꽃
어느 순간 홀연히 자취를 감춘 한 여인
노고단 눈밭에 발자국이라도 남아 있을까
그 흔적을 따라 둘레길을 걷노라면
눈물인지 녹아버린 눈물인지
머금은 물기로 피어난 제비꽃은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환생한 그녀인가 보다
보리밥 한 그릇에 행복 가득했던
그때를 생각해서라도
나를 생각해 다오
청 보리 춤추는 오월 보리밭에서
가녀린 입술에서 뿜어내는
연한 향기에 취하고 싶다
남산 제비꽃이여...
낮 2시 15분, 흥부골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지리산 자락에 앉은 휴양림은 계곡과 숲이 어우러져 휴양하기에 알맞은 장소로 보인다. 그럼에도 어떤 연유에서인지 폐쇄됐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앞으로 보이는 언덕만 넘어서면 내리막길이고 평탄 길이 이어진다는 안내다.
말만 들어도 한 숨 돌리는 여유가 생긴다. 임도는 잘 닦여 있고, 편안함은 최고조에 이른다. 숲 속에 가려진 옥계저수지를 뒤로 하고 큰 길로 나오니, 화수교를 건너 마을 안길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 종착지인 서림공원까지 약 5.0km는 람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흥부골자연휴양림흥부골자연휴양림은 폐쇄됐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 정도길
1960년대 초 화수리 마을은 대홍수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당시 군인들은 마을에 주둔하면서 이재민들의 가옥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때 군인들이 만들어준 화수마을이라 하여 군화동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 이어서 비전마을을 만났다. 입구에는 동편제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비전마을은 가왕 송흥록·국창 박초월 생가가 있던 마을로 2000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가왕 송흥록 생가에서 듣는 판소리
가왕 송흥록은 조선후기 판소리의 중시조 또는 가왕으로 꼽히는 명창이다. 국창 박초월은 해방 이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판소리 수궁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로 알려져 있다. 생가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니, 스피커에서 구성진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릴 적 나의 할머니는 동네에서 소문난 소리꾼이었다.
코흘리개 아이는 그때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할머니 소리를 들으면 왜 그렇게 울적하고 눈시울이 적시어졌을까. 뱃속 깊은 곳에서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소리는 당시 힘들었던 한이 담긴 피 끓는 절규의 소리였다. 가왕의 소리를 들으니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떠오르고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잠시 북받치는 감정에 빠지고 말았다.

▲송흥록 생가비전마을은 가왕 송흥록, 국창 박초월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 정도길
람천은 지난 밤 내린 비로 흙탕물이다. 강을 타고 부는 봄바람은 코끝을 자극한다. 강둑 양쪽으로는 벚꽃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남원보다 위도가 높은 함양은 벚꽃이 만개해 축제가 열리는데, 여기는 불그스레한 꽃망울을 아직까지 달고 있다.
기온차가 1주일 이상 나는 것만 같다. 다음 주가 되면 벚꽃 터널로 장관을 이룰 듯하다. 직선코스로 이어지는 길, 그것도 막바지 약 5km구간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발바닥과 복사뼈 언저리가 뻐근하다. 차라리 높낮이가 있는 길이 편하지 않을까 싶다.

▲람천 벚꽃길람천 양쪽으로 벚꽃길이 잘 조성돼 있다. ⓒ 정도길
오후 4시 15분, 지리산둘레길 장항~운봉 구간 마지막 지점인 서남공원에 도착했다. 6시간 20분 동안 16.8km를 걸었다. 둘레길 걷기 책자에 스탬프를 찍었다. 이 구간에는 서림공원 외에 장항마을 뒤쪽 노루목 당산 나무 터에도 있다. 힘든 토요걷기 걸음에 묵묵히 참고 따라준 나의 발에게, 몸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아울러 함께 한 일행 모두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아래는 주요경유지와 소요시간이다.
● 지리산둘레길 장항~운봉 구간 주요 경유지 및 시간표(총 16.8km, 6시간 20분)
- 장항마을(09:55) ~ 배너미재(10:35, 1.1km) ~ 수성대(0.8km) ~ 중군마을(12:05, 2.9km) ~ 구인월교(12:30, 2.1km) ~ [인월 식당 점심 및 휴식(12:40~13:40)] ~ 월평마을(13:50, 0.2km) ~ 흥부골자연농원(14:15, 1.5km) ~ 군화동(2.9km) ~ 비전마을(15:12, 0.8km) ~ 신기마을(2.0km) ~ 북천마을(1.1km) ~ 서림공원(16:15, 0.8km)
● 고도 표 : 400m ~ 600m(운봉 460m, 인월 418m)
● 걷기 방향 : 검정화살표(반시계 방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여행, 인생여정>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