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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밥 때도 아닌데 길게 늘어선 줄. 김포오일장에서 발견한 장면이다 ⓒ 김지영
"조금만 늦으면 못먹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천막 앞에 사람들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길거리 오일장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다. 대체 무슨 줄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시민 한 분이 웃으며 "아침부터 와요. 조금만 늦으면 재료 떨어져서 못 먹어요"라고 했다.
이곳은 장이 서는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수타 칼국수를 먹기 위해 인근 주민들이 찾아오는 '숨은 맛집'이다. 줄 끝을 따라가 보니 '칼국수'라는 작은 간판이 달려 있다. 좌석이라 해 봐야 비닐 천막 안 접이식 의자들, 메뉴도 손칼국수와 잔치국수 정도가 전부다.
대신 밀가루 반죽만큼은 그날그날 손으로 밀어 직접 뽑는다. 한 그릇 6천 원, 장이 서는 날이면 오후 두 시도 되기 전에 재료가 동난다고 한다. 시골 오일장의 인심과 '줄 서서 먹는 맛집 문화'가 이곳에서 묘하게 섞인다.
오일장 하면 흔히 떠올리는 건 '싸고 빨리 사 오는 곳'이다. 그런데 김포 오일장에서는, 오히려 이 낯선 풍경이 사람들을 한 자리에 묶어 세운다. 김포시 관광웹에 따르면 김포 오일장은 조선 후기인 1770년 무렵부터 열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포 지역의 농산물과 생활필수품을 사고파는 장터로 자리 잡으면서, 이 시장을 중심으로 자연스레 집과 사람이 모여든 전형적인 '시장 중심' 마을 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김포 오일장을 오랫동안 일부러 피해 왔다. 초등학생 때 야채 좌판 한켠에서 쪽파를 까던 기억 때문이다. 장 구경을 가자며 나를 데려온 아버지는 바빴고, 나는 "이거 다듬고 있어라"라는 말 한 마디에 손님인 동시에 일손이 되었다.
수북이 쌓인 채소 더미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 쪽파를 까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우리 반 반장이었다. 시골 장터에서 그를 마주쳤다는 사실이, 어린 나에게는 그저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더 깊숙이 숙이고 쪽파만 바라봤다. 반장의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야채 값을 흥정했고, 반장은 계산을 마친 엄마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정말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니면 일부러 못 본 척해 준 걸까. 어쨌든 그날 이후 김포 오일장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랬던 내가 이곳을 다시 찾게 된 건, 지난달 손에 쥔 37만 원짜리 대형마트 영수증 때문이다. 마트만 가면 이상하게 계획에 없던 물건까지 장바구니에 들어간다. 식비라도 조금 아껴보자는 마음에, 지난주 김포 오일장으로 향했다. 치솟는 물가 속에서 지갑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둘러싼 김포오일장 ⓒ 김지영
다시 찾은 장터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논과 밭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시장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상인들의 모습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화물차 뒤를 열어놓고 앞에 상자를 내어놓던 좌판이 대부분이었다. 비가 후두두둑 떨어지기라도 하면 상인들이 허겁지겁 천막을 꺼내 임시 지붕을 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비도 안 오는데, 지붕 있는 천막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래도 장날은 여전히 매달 2·7·12·17·22·27일,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변함없이 이어진다. 그때랑 똑같다. 풍경은 달라졌지만, 장의 본질은 그대로다. 들깨를 한 되 사고, 콩나물과 두부를 집어 들었다. 고등어 몇 마리와 돈까스, 떡갈비 등 반찬거리도 담았다. 주전부리 전통 과자까지 보태니 장바구니가 묵직해졌다. 계산을 모두 마치고 합계를 더해 보니 1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한 달 반찬 거리가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쪽파를 까던 어린 소녀가 불쑥 떠올랐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소녀를 나는 달래 주었다. 별거 아니라고, 어릴 적 추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그 덕에 지금 이렇게 아주 잘 성장했다고. 어른이 되었다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