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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후 5시, 충남 천안시 동남구 청수동에 위치한 카페 '부에노' 2층 이벤트룸. 봄기운이 완연한 오후, 유리창 너머로 부드러운 햇살이 공간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담소와 웃음이 오갔을 카페는 이날만큼은 다른 분위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조용히 자리를 잡는 사람들,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이들, 그리고 무대를 바라보며 말을 아끼는 시선들.
그 자리는 단순한 행사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을 함께 듣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발표하는 이종분과 이를 지켜보는 지인들 ⓒ 이수현
이날 이곳에서는 1950년생 이종분씨의 자전적 수필집 제본 기념회가 열렸다. 정식 출판이 아닌, 가족과 지인들을 위해 제작된 소규모 '제본' 형식의 책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시간과 무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종분씨가 쓰고 정리한 56쪽 제본집 ⓒ 이수현
책의 제목은 <만세반석 위에 세운 77년의 기도>. 77년의 삶을 스스로 기록하고, 처음으로 세상 앞에 꺼내놓는 자리였다.

▲행사장에 게시된 북콘서트 현수막 ⓒ 이수현
행사는 요란하지 않게 시작됐다. 계단식으로 배치된 좌석에 앉은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무대를 향해 시선을 모았고, 사회를 맡은 박진희씨의 진행 아래 이종분씨는 마이크를 들고 준비해 온 원고를 펼쳤다. 종이를 한 장 넘기고 또 한 장 넘기며 이어지는 낭독은 단순한 글 읽기를 넘어, 지나온 세월을 다시 마주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분명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문장 하나하나에는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녀의 삶은 동시대를 살아온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또래보다 일찍 짊어져야 했던 노동의 시간, 결혼 이후 이어진 갈등과 고통, 그리고 4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반복된 상처와 인내. 그 모든 시간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버텨낸 시간'에 가까웠다.
행사 중 스크린에는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가난 → 노동 → 결혼 → 고통 → 기도 → 회복" 짧은 문장이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 흐름을 따라 한 사람의 삶을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박진희 사회자와 이종분 예비작가 ⓒ 이수현
낭독이 이어지던 중, 이종분씨는 결국 참고 참다가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들이 비로소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처럼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쓰지 않아 굳어버린 잉크가 물을 만나 서서히 풀리듯, 그녀의 삶 속에 묶여 있던 감정들도 그날, 조용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읽어 내려가는 문장들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증언하는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역시 단순한 청중이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 마주하는 '증인'과도 같았다.
행사의 분위기를 바꾼 것은 가족들의 등장이다.
이날을 위해 필리핀에서 거주하던 손자와 손녀들이 무대 앞으로 나왔다. 어린 목소리로 할머니를 향해 축하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축하해요."
짧고 단순한 노래였지만, 그 안에는 세월을 건너온 사랑이 담겨 있었다. 삶을 버텨낸 한 사람과, 그 삶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가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미소와 눈물이 함께 번졌다.

▲할머니를 위해서 축가를 부르는 손자 한유진(초등학교 3학년) ⓒ 이수현
그리고 이날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이어졌다. 자녀 중 아들의 이야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살아오며 아버지에 대해 털어놓았던 서운함을 그동안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했다. 어쩌면 마음 한켠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도 남아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신도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워보면서 그 말들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정말 대단하게 사셨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오해와 이해, 거리와 공감, 그리고 서로 다른 자리에서 쌓여온 시간들이 그 한마디 안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공기는 분명 달라졌다.
그날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아니었다. 각자의 삶 속에서 굳어 있던 감정들이 서로를 통해 풀려나오는 자리였다. 출판이 아닌 '제본'이라는 형식 또한 의미를 더했다. 이 책은 팔리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책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을 남기기 위한 기록이었다. 그래서 더 진솔했고, 그래서 더 묵직했다.
행사의 마지막은 천안성심교회 담임목사 전용근 목사의 축도로 마무리됐다. 길지 않은 기도였지만, 그날의 시간을 정리하듯 조용히 흐르며 자리를 마쳤다.
행사가 마쳤음에도 참석자들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말을 아꼈고, 누군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의 시간은 크지 않았지만 깊었다. 77년의 삶은 한 권의 책으로 묶였고, 그 책은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한 번쯤 자신의 삶을 꺼내어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이종분의 인생은 비로소 스스로를 이해받았고, 마음 깊이 맺혀 있던 상처의 응고를 풀어내는 시간으로 마무리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한많은 삶을 스스로 정리하신 글로 만드신 이종분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더 보완하시어 정식 출판을 하신다고 하시니 이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