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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외장하드에는 결혼 때부터 최근까지 년도 별로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남편이 큰 마음 먹고 이틀에 걸쳐서 정리를 했다. 정리를 하면서 이상하다고 했다. 중간에 몇년도 사진이 거의 없다고 한다. 특히 내 사진이 아예 없었다. 그 비어 있는 시간이 의아했다. 왜 그때만 내 모습이 없을까 생각을 하는데 남편이 말했다."아, 당신이 아이들 키우느라고 힘들었을 때네"라고.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의 육아에 찌들어 흑화 되었을 때가 있었다. 첫째가 27개월 때 둘째를 낳았다. 내 인생에 돌봐야 할 애기가 두 명 생긴 것이다. 첫째의 수유와 잦은 병치레로 밤 잠을 못 자다가 조금 나아질 때 쯤 둘째가 태어나면서 다시 수유의 시기로 돌입했다. 그때는 통으로 아침까지 자는 게 소원이었다. 친정엄마는 허리 디스크로 아프셨기 때문에 딱히 육아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늦게 들어오는 남편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혼자 쪽잠을 자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수면부족도 부족이었지만 마음이 힘들었다. 육아와 가사라는 것이 일은 많은데 결과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급여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잉여인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 다 하는 일인데 나만 유난을 떠는 것 같이 보일까 봐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도 못했다.
둘째를 업고 큰 아이를 밥을 먹이고 큰 아이를 재우곤 했다. 어떨 때는 내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서서 대충 때우기도 했다. 하루종일 아이들 뒤치닥거리 하다보면 어른들과 대화 한 번 하지 못하고 끝날 때도 있었다. 사진 한 장 찍을 여유가 없던 시절.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던 시기였다.
친구들은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아가고 진급을 하고, 인정받아 가고 있을 때 나는 집에서 익다 못해 발효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육아의 과정 자체가 가장 가치 있고 숭고한 일인 것을 알지만 그때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의 결과물처럼 여겨져서 천국와 지옥을 오가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홈페이지 화면 캡처. ⓒ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라는 드라마는 20년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지 못한 영화감독 지망생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모임에 가면 그는 사람들이 피할 정도로 말 폭탄을 터드린다.
친구나 선후배가 영화를 만들어서 개봉하면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혹평을 쏟아낸다. 그가 쓰는 시나리오는 주인공이 힘이 없다는 냉정한 평가를 받고 검토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결국 제작사 대표로부터 이제 그만 두라는 말을 듣는다.
남편과 드라마를 중간쯤 보면서 "당신이라면 저럴 때 어떻게 할 것 같아"라고 물어봤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나는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드라마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서는 주인공의 입장을 보니까 그만 두라고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구차해 보여도 영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주인공 황동만이 결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인의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결국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 속에서 그 마음을 지켜내기 위해 무던히도 자신을 밀어올리는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누구도 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동만이 아닌 그를 싫어하는 친구나 선후배, 누구라도 20년 동안 눈에 보이는 결과 없이 버틸 수 있을까.
드라마의 끝 부분에 다다르자 사람들을 만나면 쉴새 없이 말하고,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쑤셔넣듯이 먹는 그의 모습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는 몸부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황동만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성과가 존재를 증명하는 세상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같았다. 주인공을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한 사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될 그에게 불어올 새로운 바람을 그려보며 다음 회를 기다린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의 sns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