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 원평 집강소 복원전 모습원평 동학혁명 집강소는 2015년 복원되었다. 이 사진은 복원 이전 사진이다. 본 사진은 사단법인)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최고원 선생이 제공하였다. ⓒ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짧은 기간이지만 동학군의 집강소 운영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공화제로 갈 수 있는 훈련기간이기도 했다. 전봉준은 특유의 지도력을 발휘하여 농민군 통치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53개 군현에 공문을 보내 노략질과 토색질하는 무뢰잡배들의 난행을 금하고, 무기를 회수하는 등 민심수습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로써 농민군의 집강소 통치는 공식화되고 행정질서가 잡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전라도 53주는 한 고을도 빠짐없이 모두 다 집강소가 설립이 되어 민간의 서정을 집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열두 가지 폐정개혁안을 실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관리의 문부(文簿)를 검열하며, 한편으로는 인민의 소장(訴狀)을 처리하며, 한편으로는 전도를 힘쓰며, 한편으로는 관민 간에 남은 군기와 마필을 거두어들이고 집강소의 호위군을 세우고 만일에 경계하였다. 이 때에 전라도에는 청소년까지도 거의 모두 도(道)에 들어 접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세에 따라 부랑자들이 한데 섞여 들어온 것도 물론 많았으며 그로 인하여 온갖 부도불법한 일이 많이 생긴 것도 면치 못할 일이었다. 이로부터 세상 사람의 동학군 비평은 자못 분분하였다.

▲동학혁명기록화(동학집강소)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외세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민관상화 즉 동학과 관의 평화협정인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전라감영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를 설치하고 전라도 지역에 민주자치를 시행하였다. 이후 전라도 외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함경도 등에도 도소(집강소)가 설치되어 폐정개혁을 실천하였다. 본 동학혁명기록화 집강소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하였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군들은 귀천빈부의 차별이 없다느니, 적서노주(嫡庶奴主)의 구별이 없다느니, 내외존비(內外尊卑)의 차별이 없다느니, 동학군은 국가의 역적이요, 유도(儒道)의 난적이요, 부자의 강적이요, 양반의 구적(仇敵)이요, 동학군의 눈 아래에는 정부도 없다고 하는 등 전라도 동학군의 기세는 날로 성하여 동으로 경상도가 흔들리고, 북으로 충청도·강원도·경기도·황해도·평안도까지 뻗쳐 들어가는 모양을 보고 조선에는 장차 큰 변란이 일어나고 말리라고 수군거렸다.(오지영, <동학사>)
군·읍의 집강소 위에는 전봉준이 전주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우도의 집강소를 직접 지휘하고 김개남을 경유하여 전라좌도를 간접적으로 지휘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의 집강소를 직접 지휘하였다. 집강소 체제가 확립된 6월 이후에는 전라관찰사 김학진은 관찰사의 정무처인 선화당에서도 밀려나서 실질적으로 전봉준의 명령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집강소는 이와 같이 통치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1894년 5월부터 11월 말까지 약 7개월간 전라도 일대에서 탐관오리처벌 및 가렴주구 폐지 뿐만 아니라 사회신분제 폐지와 신분해방 및 지주제도개혁 등 봉건적 구체제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고 농민들이 원하는 농민적 민족주의와 농민적 민주주의의 신체제를 수립하려는 농민통치를 과감히 단행한 것이었다.(신용하,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