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의 사격 모습이 사진은 청일전쟁사진첩에 나오는 일본군 사격 모습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군은 초기에는 관군을 앞세워서 한국인들끼리 상잔을 벌이도록 하고 자신들은 무기를 대주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등 후방 지원을 하다가 전국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전략을 바꾸어 직접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나섰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 중 경기·양호(兩湖) 지방의 동학농민군은 가장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북상(北上)을 기도하였다. 즉 김정현·안승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수원에, 고석주가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홍천에, 김복용·이희민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목천 세성산에, 최한규가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유구에, 정현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목천에 각각 웅거하여 서울로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전봉준은 10월 초순 드디어 북상으로의 군대를 움직였다. 이리하여 전봉준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충청도경에 이르자 여산의 영장 김갑동이 관군을 거느리고, 또 공주의 유생장 이유상은 민병을 거느리고 동학농민군을 막아 보려 하였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곧 이들을 격파하여 김갑동·이유상을 사로잡았다. 이어 대군을 논산에 주둔시키고 대오를 정비한 후 공주로 진격해 들어갔다.(김의환, 앞의 책)
동학농민군은 김개남 부대가 전주를 포위하고, 손화중 부대가 일본군의 상륙에 대처하기 위해서 나주에 포진하는 한편 주력부대 2만 여 명의 전봉준 부대는 공주 주변인 효포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일본군의 방어진지인 공주를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전국 각처에 정보원과 밀정을 파견하여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자 일본은 밀정들을 약장수로 변장하거나 관광객으로 가장시켜 현지에 투입, 각종 정보를 입수하였다.
일본의 정보수집망은 두 갈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의 참모본부에서 이지치 코오스케 소좌를 부산에 파견하여 조선주재 일본공사관 와타나베 테츠타로오 대위 등과 제휴하여 정보수집에 종사케 한 것이다. 이 두 정보원은 종래의 밀정들인 약장수·관광객을 지휘하여 전라도 일대 만이 아니라 전국을 대상으로 살폈다.
또 하나는 해군의 지휘에 의해 측량선·상선을 가장하여 해안일대를 돌아다니며 아무데나 상륙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청군의 동정을 엿보기도 했다. 이와 달리 일본 민간단체로 낭인의 집합체인 현양사(玄洋社)의 천우협(天佑俠) 패들은 부산에 상륙하여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며 농민군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 다케다 노리시, 우치다 료헤이, 스즈키 다카미 등은 계속 경상도 일대를 거쳐 전라도로 접근해 왔다.
그들은 부산의 오사키 쇼키치의 법률사무소를 거점으로 정보를 수집해 오다가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이용하여 친일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그리기도 했다. 이들은 끝내 집강소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봉준을 만나기에 까지 이른다.(한상일, <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 까치)
덧붙이는 글 |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