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초임 교사 시절, 난 이른바 '교복 예찬론자'였다. 브랜드로 인한 아이들 각자가 느낄 경제적 위화감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 아이들이 선호하는 '등골 브레이커'에 부모의 등허리가 휘었다. 한 벌에 100만 원을 호가하는 패딩이 교복을 대신한 적도 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완고한 '교복 폐지론자'가 됐다. 만만찮은 가격으로 교복이 또 하나의 '등골 브레이커'가 된 이상 유일한 장점마저 사라졌다고 여겨서다. 누구 말마따나, 지금 교복의 존재 이유는 매일 아침 옷장을 열고 뭘 입을까 고민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것뿐이다.
교복 업체들이 조직적으로 입찰에 가담해 가격을 올리는가 하면, 그들끼리 특정 학교의 낙찰 업체를 정한 뒤 나머지 업체들이 들러리를 서는 일이 횡행했다. 경쟁을 가장해 가족 명의의 유령 업체를 동원하는 경우마저 등장했다.
비리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가격에 견줘 품질이 형편없었고, 하자에 대한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업체를 찾아가 A/S를 받는 게 번거롭다며, 집 앞 세탁소에서 수선을 받겠다고들 했다. 말 그대로, 울며 겨자 먹는 꼴이었다.
수많은 옷 중의 'One of Them'
교복을 입으면 아이들이 스스로 행동거지를 조심할 거라는 인식도 케케묵은 이야기다. 교복을 입은 채 길거리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고, 형태가 하나같이 어두운 색깔의 정장 스타일이어서 멀리서 보면 교복인지도 잘 모른다. 명찰조차 탈부착이 가능하다.
교복을 변형해서 입는 경우도 허다하다. 바지의 기장과 폭을 취향껏 늘리고 넓히는가 하면, 셔츠도 단추를 다 채워 입는 아이도 드물다. 교복조차도 패션 아이템으로 여기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을 표현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교복은 수많은 옷 중의 'One of Them'인 셈이다.
또, 애교심을 고취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발상도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의무교육 체제인 데다 전국 대다수 지역이 평준화한 마당에 학교에 대한 자긍심도 기대하긴 어렵다. 최상위권 아이들이 진학하는 특목고나 자사고의 교복은 차별과 배제의 상징으로 작용한 지 이미 오래다.
작년 초 당시 학교 안팎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교복을 폐지할 목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학생자치회와 학부모, 교사의 찬반 의견을 묻고, 대안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였다. 현행 규정상 그들 다수의 동의 없이는 교복을 폐지하기는커녕 디자인조차 함부로 바꿀 수 없다.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교복 착용에 대한 학부모들의 압도적 지지는 예견된 바지만, 아이들의 찬반 비율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교복을 없애면 안 된다는 의견이 훨씬 많았다. 교복을 폐지하기보다 교복 착용을 자유의사에 맡기자고 했다. 입든 안 입든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럴 거면, 굳이 값비싼 교복을 지정해 사서 입을 필요가 없었지만, 평생 간직할 졸업 앨범 사진을 교복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찍을 수는 없다고 했다. 교복을 사이즈 별로 몇 벌 준비해 놓으면 될 일 아니냐고 해도, 아이들은 막무가내였다. 교복에 대한 그들의 '애착'은 대단했다.
자퇴하려던 아이가 주저했던 이유
몇 해 전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겠다며 끝내 자퇴를 선택한 한 아이가 들려준 에피소드 하나. 자퇴는 내신 성적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 명문대 진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다. 그런데, 최종 자퇴원을 제출하기 전까지 두어 달 넘게 주저했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더 이상 교복을 입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단다. 대학에 진학한 지금도 그는 교복을 버리기는커녕 세탁해서 옷장 속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레트로'가 유행하면서 대학의 축제 때도 고등학교 교복 차림이 '드레스 코드'인 행사 꼭지도 있단다.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인식은 아이들과 부모 세대 간 차이가 없었다. 그것도 교복 앞에는 늘 '단정한'과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교복 차림은 늘 단정해야 한다고 여겨선지, 부지불식간 교복을 입은 학생은 단정하고, 사복을 입은 학생은 그렇지 않다는 편견이 작동한다.
결국 교복 폐지에 실패했을뿐더러 되레 복장 지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마저 일었다. 학부모뿐만 아니라 아이들 다수가 교복의 폐지에 반대하고 나섰으니, 단속의 명분이 생겼다고 해석하는 거다. 심지어 학칙에 교복 착용을 의무화하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상위법인 학생인권조례상 학교는 아이들이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 교복을 구매하는 것도, 입는 것도 자유이며, 디자인과 재질 등을 선택하는 것도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교복 선정위원회의 구성에도 학부모들이 과반수다.
교복에 관한 한 학교는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절차대로 진행하는 '행정 기관'일 뿐이다. 교복 관련 업무는 모두가 꺼리는 '잡무'일 뿐, 더는 교육적 가치를 따져볼 겨를이 없다. 실효성도 없는 복장 단속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두고 교사들끼리 쓸데없는 논쟁만 벌이는 형국이다.
이제 교복의 존재 이유를 따져볼 때가 됐다. '학교 자율 결정'이라는 말로 두루뭉수리 눙칠 게 아니라, 교복이 교육적 의미를 잃었다면 교육부가 공식적으로 폐지를 선언하는 게 맞다. 지금 학교마다 학칙 내 교복을 비롯한 복장 규정은 두발 제한과 더불어 사문화한 지 이미 오래다.
교복의 필요성을 최근 드라마나 영화 속 교복 입은 주인공들의 멋진 모습에서 찾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교복이 학생들의 유대감을 높이고 일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던 때는 지났다. 학교에서 입어도 그만이고 입지 않아도 그만인 교복이라면 더는 교복이라고 할 수 없다.
남은 거라곤, 어느 학교 교복이 더 세련됐느냐는 비교와 경쟁 심리뿐이다. 몸에 달라붙는, 이른바 '슬림핏'의 교복이 몇 해 유행하더니, 이젠 펑퍼짐한 '오버핏'이 대세가 됐다. 하루가 다르게 덩치가 커지면서 신입생 때 맞춘 교복을 고3 때까지 입는 경우가 드문 까닭이기도 하다.
교복을 '규범'이 아닌 '트렌드'로 받아들이는 아이들
경험으로 미루어, 이 또한 오래 지속되진 못할 것이다. 한 해가 멀다 않고 유행이 뒤바뀌는 세상에 교복도 자유롭지 못하다. 교복이 개성을 억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기는커녕 되레 교복이 유행을 선도하는 모양새다. 아이들은 교복을 '규범'이 아닌 '트렌드'로 받아들인다.
매일 아침 교문에 서서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관행처럼 교복 입기를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만의 패션 감각을 뽐내려는 '일탈'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교복은 통일성이 생명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옷차림과 신발, 가방을 보면 별도의 교복 지정이 불필요할 정도로 획일적이다.
등굣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신발의 형태와 브랜드마저 동일한 경우가 많다. 심지어 책가방조차 죄다 검은색 배낭형이고, 끈마다 매단 키링도 어슷비슷하다. 하나같이 개성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유행을 따라 비슷해지려는 욕망일 따름이다.
과거엔 천편일률적인 교복이 은연중에 아이들의 사고와 행동을 획일화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지금 학교에 와서 본다면 데면데면할 성싶다. 아이들의 옷차림은 교복보다 더 획일화되어 있다. 교복은 어느덧 수명을 다한 또 하나의 '등골 브레이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