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산 반야산 관촉사 일주문 ⓒ 이완우
5월 중순은 연두색 다채로운 나뭇잎들이 비슷한 녹색으로 짙어지는 계절이다. 논산 반야산 관촉사를 찾았다. 관촉사는 고려 광종 21년(970년)부터 목종 9년(1006년)까지 37년에 걸쳐 완성된 은진미륵(석조미륵보살입상)이 서 있는 천년 사찰이다.
은진미륵 불상은 거대한 규모임에도 온화한 미소와 정교한 보관이 조화를 이루어, 고려 초기 특유의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불교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곳은 고려 제4대 왕 광종이 고려 초기 왕권 강화와 국가 기틀은 다지는 과정에서 황제국을 선포하고, 왕실의 역량을 결집하여 거대한 석조 불상 조성을 추진했던 현장이었다. 이 석불 혜명 대사가 주도하여 광종의 발원으로 착공하였다. 경종과 성종 시대를 거쳐 목종 대에 이르기까지, 고려 초기 네 국왕의 재위 기간에 높이가 약 18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석불을 조각하고 쌓아올렸다.

▲논산 관촉사 천왕문과 해탈문 ⓒ 이완우
▲ 논산 관촉사 해탈문
이완우
관촉사가 자리한 반야산은 먼 옛날에 금강의 지류인 표진강 물줄기가 산 아래까지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풍수지리적으로 반야산은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며 돌계단을 오르면 사찰의 출입문으로는 보기 드문 형태인 석조 출입문(해탈문 解脫門)이 나타난다. 해탈문 위로 붉은 단풍잎이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흔들리지만, 문 안쪽 사찰 도량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평온함과 고즈넉한 정취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관촉사 은진미륵 설화
은진미륵 첫째 설화: 고려 광종 때 한 여인이 사제촌(현 관촉리 인근)에서 고사리 꺾다가, 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여인은 땅속에서 솟아오른 집채만 한 바위 세 개를 보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이 상서롭게 여겨 혜명대사에게 그 바위에 부처를 새기게 하였다. 이 설화는 '이곳 반야산에 부처를 새길 만한, 집채만 한 바위가 있었다'는 사실로 이해된다.
은진미륵 둘째 설화: 혜명대사가 오랜 세월 끝에 불상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조상하였다. 그러나 불상이 너무 거대하여, 차례로 올려 놓을 방법으로 고민하였다. 어느 날,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이 불상의 아랫부분 먼저 세우고, 모래를 경사지에 쌓아서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올렸다. 이렇게 거듭하여 불상을 다 쌓고는 모래를 치웠다. 대사는 이 장면을 보고 은진미륵 조성을 마쳤다. 이 설화는 거대 불상 조성에 왕실과 백성들의 노력과 지혜가 함께 하였다는 서사로 이해된다. 수천 년 전부터 이집트 피라미드나 다른 거대 석조물(석탑 등)에서 모래나 흙을 쌓아 비탈면을 활용한 토축 기법은 전승되어 왔다.

▲논산 관촉사 도량 ⓒ 이완우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이완우
관촉사 넓은 도량은 화려한 수많은 연등이 줄지어 있었다. 반야산(96m)을 병풍 삼아 당당히 서 있는 은진미륵은 18m가 넘는 거대한 크기와 거대한 보관, 온화하면서도 신비로운 미소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은진미륵 공사에 쏟은 고려 왕실의 염원
토목 공사 현장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기자에게 은진미륵은 거대한 토목 구조물로서 보였다. 은진미륵은 석탑이나 석등의 구조와 같이 대석, 탑신(석등)과 옥개석 같은 분절 구조였다.
총 18m에 달하는 석불의 높이는 하부(다리와 허리 이하)가 약 9m, 중부(가슴과 목)가 약 4m, 상부(머리)가 약 2.4m, 보관이 약 2.5m였다. 부피와 무게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중요한 요소이다. 석불의 하단은 약 210톤(80㎥), 중단은 약 170톤(65㎥), 상단은 약 50톤(20㎥), 보관은 약 25톤(10㎥)로 전체 중량은 약 450톤(175㎥) 규모로 추정된다. (문화유산 자료집 수치를 참조하고, 화강암 1㎥ 당 2.6톤의 중량으로 계산하였음.)
하단 210톤에서 보관 25톤에 이르기까지, 총 450톤이라는 이 거대한 수치는 단순히 돌의 무게가 아니다. 그것은 지난 시대의 상흔을 짓누르고 새로운 화합의 시대를 세우기 위해 고려 왕실과 백성이 함께 짊어져야 했던 '역사의 무게'였다.
석불의 높이가 18m이고 약 450톤의 중량인데, 거대한 바위 하나로 조성하여 세우기에는 고려 시대 당시의 장비와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현재 은진미륵이 서 있는 모양으로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석재를 가공하고 조각하여 토축 공법으로 추정되는 조립 공정도 고려 시대 토목 기술을 보여준다고 여겨졌다.
반야산 정상의 중턱인 해발 30~40m 높이에 관촉사의 가람이 자리한다. 반야산 아래 평야나 마을은 해발 5~10m로 낮은 지대이다. 이런 환경에서 은진미륵 조성에 필요한 석재는 반야산 중턱에서 공급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가 있다.
은진미륵을 조성하며 소요된 37년이라는 세월이 수긍된다. 높이 19m의 450톤 중량의 석재를 재료를 채석하고, 다듬고 조각하며, 운반하려면 공정마다 오랜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석불의 각 부위를 쌓아올리려 비탈면 흙쌓기를 하고 다지려면 몇 년씩 걸리고, 비탈면으로 석불의 각 부분을 밀어올려 조립하고 마무리 작업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은진미륵이 조성되었다. 고려 왕실은 후삼국 통일 이후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과거 백제 유민이었던 지역민들을 포용하여 새로운 고려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화합의 한마당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논산 관촉사 앞 풍경 ⓒ 이완우

▲논산 관촉사 대광명전, 석탑 배례석, 미륵전 내부, 미륵전 ⓒ 이완우
은진미륵, 계백의 황산벌을 진혼하다
관촉사의 미륵불상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계단을 올라가 미륵불상 높이에 있는 산신각으로 올라갔다. 이곳에서 논산시 일원이 널리 보였다. 관촉사에서 동북쪽으로 5~6km 너머에 황산벌 들판이 펼쳐졌다. 그 뒤편으로 4~5km 거리에 황산성이 자리한다.
백제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로 신라군에 항전하던 황산벌과 후백제의 신검 군대가 고려 군에 맞서다가 마지막 항복한 장소가 멀리 펼쳐졌다. 우리 역사상 치열했던 '시대의 마침표'가 찍힌 장소가 미륵불상 옆 산신각 계단에서 멀리 조망된다.
산신각에서 내려와 미륵전을 찾았다. 법당은 대체로 내부에 불상을 안치한다. 그러나 관촉사 미륵전 내부에는 불상이 없고, 야외의 은진미륵을 이 법당의 주불로 모시고 있다. 미륵전의 북쪽 벽면에 길게 가로로 난 유리창을 바라보면 은진미륵의 모습이 액자 속 그림처럼 보인다. 일렬로 선 은진미륵과 석등 석탑을 한 개의 창으로 함께 볼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미륵전 내부이다.

▲논산 관촉사 석등 화창과 미륵보살의 시선 ⓒ 이완우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앞 기도터. 거대한 은진미륵 앞에 한 어린이가 고사리손을 모으고 엎드리고 있다.
이완우
은진미륵 앞에 서 있는 석등의 화창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무릎을 펴거나 굽혀가면서 미륵보살의 눈과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은진미륵의 눈과 시선을 마주하며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관촉사를 떠나면서 뒤돌아 보았다. 천 년 전, 이곳은 수많은 백성들과 석공들이 거대한 바위를 깨고 조각하고 운반하는 토목 공사 현장이었다. 거대한 불신(佛身)을 끌어올리기 위해 흙산을 쌓고 다지던 백성들의 땀방울이 배인 땅이었다. 37년 동안 백성들이 거친 돌조각 틈과 성토한 흙바닥을 밟으며 마주한 것은 짓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금창초(金瘡草) 야생화였을 것이다.

▲야생화 금창초 ⓒ 이완우

▲야생화 금창초 ⓒ 이완우
금창초는 겨울에도 잎이 마르지 않고 바닥에 붙어 지표면을 덮는 '로제트' 식물이다. 4~5월경 1cm 크기도 안 되는 작은 보라색 꽃이 층층이 피어나는데, 흰 털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금창초는 화려하지 않지만, 낮은 곳에서 전쟁터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상처를 돌봐주던 진정한 '치유의 풀'이었다. 금창초의 꽃말은 '희생, 치유와 포용'이다.
은진미륵은 어제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가려는 우리 사회의 앞길에 천 년 전 사람들이 바랐던 화합의 메시지를 제시하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