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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옷을 좋아한다. 예쁜 옷을 보는 것도, 입는 것도 좋아해서 특별기획전 '노라 노, First and Forever'가 열린다는 소식에 관심이 갔다.

 2026년 경운박물관 특별기획전 '노라 노, First and Forever' 포스터.
2026년 경운박물관 특별기획전 '노라 노, First and Forever' 포스터. ⓒ 경운박물관

회고전이 열리는 곳은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관 1층에 있는 경운박물관 기획전시실. 경기여고동창회인 경운회 창립 80주년을 맞아 백수를 앞둔 노라 노(1928년생~, 경기여고 34회 졸업)의 패션 세계와 그의 패션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다.

'헌정 전시'라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시 기획자가 서영희 감독이라서 기대가 높았다. 서영희 감독이 누군가. 패션과 전통에 관한 굵직한 전시를 도맡아 해오다시피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닌가(나에게는 루이비통과 협업한 함 트렁크 제작자로 인상 깊이 남아있다).

솔직히 그 전까지 디자이나 노라 노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대단한 디자이너가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라벨 아카이브 1952년부터 2026년까지 노라 노를 대표한 로고가 들어간 라벨들
라벨 아카이브1952년부터 2026년까지 노라 노를 대표한 로고가 들어간 라벨들 ⓒ 은주연

노라 노의 본명은 노명자. 헨리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가 자동 연상될 만큼 노라 노 선생님의 삶은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주체적 여성의 현신이었다.

전시 설명집에 따르면, 노라 노는 리나라 초대 방송관리국장인 노창성과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인 이옥경 사이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았다. 노라 노는 남편이 전장으로 떠난 후 미군정청의 보건후생부 여사무원으로 취직했는데 그때 배운 영문 타이핑이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다(이 영문 타자기가 그녀의 인생에서 얼마나 상징적인지 헌정 전시회에서 아리랑 드레스와 타자기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한국 패션의 역사, 디자이너 노라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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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남편과 이혼한 노라 노는 외환은행을 창립하기 위해 한국에 온 스미스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스미스가 주말마다 여는 파티에 통역으로 늘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손수 만들어 입은 옷들로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끌었다. 이를 계기로 스미스의 추천을 받아 미국 패션스쿨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전시회 말미에 영상이 상영되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성실하게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누군가 그것을 알아보고 도움을 준다"는. 아마 노라 노는 은인인 스미스를 만났던 첫 기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구나 싶었다.

이때부터 노라 노의 활약은 거침이 없다. 그녀가 미국에서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1949년의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의 나라였다. 옷을 디자인해서 만들려 해도 원단 자체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노라 노는 전통 한복 원단을 사용해 양장옷을 만들었다.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아리랑 드레스'다.

은박 아리랑 드레스 1959년 서울에서 열린 '미국 부인회' 패션쇼에서 최지희 배우가 입고 선보인 이브닝드레스
은박 아리랑 드레스1959년 서울에서 열린 '미국 부인회' 패션쇼에서 최지희 배우가 입고 선보인 이브닝드레스 ⓒ 은주연

당시 서구식 이브닝드레스는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아 파티복을 고심하던 외교관 부인들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아리랑 드레스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서구적 사교 현장에 완벽히 어울렸다(아리랑 드레스는 2014년 10월 대한민국 국가 등록문화재 제613호로 지정됐다).

노라 노의 역사가 곧 한국 패션의 역사라고 할 만큼 그녀는 한국 현대 복식사의 독보적인 선두주자였다. 1956년 반도 호텔, 패션쇼라는 개념도 없던 한국 사회에서 그녀는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를 연다. 소설가 김말봉이 사회를 맡은 패션쇼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였던 조미령과 최은희, 모델 박현옥(1957년 초대 미스코리아 진) 등이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아리랑 드레스 노라 노의 초기 디자인인 전통 삼회장저고리를 변형한 아리랑 드레스
아리랑 드레스노라 노의 초기 디자인인 전통 삼회장저고리를 변형한 아리랑 드레스 ⓒ 은주연
그것을 필두로 노라노는 영화와 무대의상, 섬유산업, 기성복 등 패션산업이 아우르는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또한 1960년대 노라노는 "옷은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며 생활"이라는 신조로 상류층 위주의 맞춤복 사업에서 대중을 위한 기성복(ready to wear) 시장으로의 전환을 선포하기도 한다. 바쁜 현대 여성들이 가봉을 위해 수차례 숍에 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고자 한국인 체형에 최적화된 표준 사이즈 체계를 만든 것이다.

"신나니까 하는 거죠" 유쾌한 할머니 디자이너

이 많은 업적을 알리는 이번 전시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984년 뉴욕컬렉션에서 선보였다는 스트라이프 실크랩 드레스였다(스타일넘버 5075인 이 드레스는 2026 보그 코리아 3월호에 노라노 선생님 인터뷰 당시 직접 착용하기도 했다). 이 옷은 엔지니어드 프린트(Engineered Prints)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전시장 섹션 5,6에 전시되어 있다.

 보그 3월호 표지. 1984년 뉴욕컬렉션에서 선보였다는 스트라이프 실크랩 드레스를 입은 디자이너 노라 노
보그 3월호 표지. 1984년 뉴욕컬렉션에서 선보였다는 스트라이프 실크랩 드레스를 입은 디자이너 노라 노 ⓒ 두산매거진

엔지니어드 프린팅 기법은 원단 전체에 같은 무늬가 반복되는 일반적인 롤 프린팅과 달리 옷의 구조와 문양이 일체화 되는 디자인기법이다. 즉 소매나 앞판, 등판 등 각 부위의 크기와 곡선에 맞춰 문양을 배치하므로 재봉선에서 문양을 끊기지 않고 하나로 이어지는 시각적 완성도를 제공한다. 이 옷은 직장에서는 물론 퇴근 후 저녁 파티까지 편히 입을 수 있도록 허리 뒤쪽에 고무줄을 넣어 디자인 했다.

이 드레스가 1987년 미국 노드스트롬 백화점 전 매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할 만큼 인기가 있었던 것은 단순히 예술적일 뿐만 아니라 효용적인 가치가 높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노라 노가 옷을 만들면서 늘 염두에 둔 한 마디는 "나는 옷을 하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깨어나길 바랐어요". 그런 디자이너의 철학이 이 드레스에서도 보이는 듯했다.

노라 노의 신념 전시장 벽면을 장식한 한 구절의 문장이 그녀의 신념을 말해준다
노라 노의 신념전시장 벽면을 장식한 한 구절의 문장이 그녀의 신념을 말해준다 ⓒ 은주연

노라 노 의상 70여 점과 함께 전시를 돌아보면서 그의 확고한 철학이 마음에 와닿았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건달 정신'과 '감사'라는 키워드. '건달'이란 단어가 전시장 벽 면에 프린트 되어 있을 때는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전시를 모두 관람한 후엔 "신나니까 하는 거죠, 해피고잉!"을 외치는 그녀에게서 99세 할머니 디자이너의 유쾌함이 느껴졌다.

그 유쾌함으로 즐겁게 오래 일할 수 있었던 그가 요즘 가장 집중하는 것은 "과거 신세진 사람들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하는 일"이라고 했다. '샤넬보다 자신이 나은 점' 한 가지로 샤넬보다 오래 일할 수 있었다는 점을 꼽은 백수의 디자이너 노라 노, 그에게서 오래된 농담 같은 다정함이 전해져왔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월요일~토요일 10:00 ~ 16:0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노라노#아리랑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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