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Korea and Seoul. Welcome to Seoul Robotics High School."
독일어보다는 영어가 먼저 튀어 나갔다. 고등학교 시절, 학력고사(현 수능)를 치를 때 제법 열심히 공부했던 독일어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삶과 연동되지 못한 채 시험지 위에서만 맴돌던 텍스트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나이 먹어 새삼 깨닫는다. 교장실을 찾아온 독일 선생님들 앞에서 내가 내뱉은 것은 결국 투박한 발음의 영어였다.

▲다시 만난 우정, 서울로봇고의 깜짝 마중지난 5월 17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서울로봇고 학생들이 독일 TBZ 브레멘 미테 방문단을 환영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오성훈
독일 브레멘 공학, 기술 고등학교(아비투어 과정), TBZ 브레멘 미테에서 학생 11명과 교사 3명이 날아왔다. 지난해 가을 우리 아이들이 독일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문화를 나눴던 바로 그 파트너들이었다. 지난 17일, 인천공항 입국장에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예고도 없이 그들을 마중 나간 것이다. 긴 여정의 피곤함을 단숨에 잊게 만든 깜짝 이벤트였다.
교장실에서 인솔교사들과 차담을 나누는 그 시각, 다행히 언어의 장벽 따위는 우습다는 듯, 진짜 '살아있는 공부'를 시작한 아이들이 시청각실에 모여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각자의 파트너들과 어울리고 있는 그들은 영락 없는 청소년이었다. 언어는 서툴렀지만 마음을 전하는 데는 무딘 목소리보다 다정한 눈빛이 더 유용했다. 우리에게는 기술이라는 만국 공통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기술이 따뜻한 만남이 되기까지
2023년 가을 우리 학생들의 독일 방문으로 물꼬를 튼 이 프로그램은, 이듬해 봄 TBZ의 답방으로 이어지며 어느덧 6회째를 맞이했다. 5월 17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질 이번 교류의 핵심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선 '공동 프로젝트'와 '수업 참관'이다. 독일 학생들은 한국 파트너와 팀을 이뤄 드론 제어와 로봇 팔을 활용한 스마트 팩토리 공정 설계 같은 심화 프로젝트 수업을 함께 소화한다. 교과서가 아닌 작업대 앞에서, 언어가 아닌 손끝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다.
수업 외 시간에는 한국의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활동이 이어진다. 학생들은 DDP와 서울스카이 전망대 방문을 시작으로 남산골 한옥마을에서의 전통 예절 체험, DMZ 견학, 강남역 인근 스튜디오에서의 K-팝 댄스 배우기 등 다채로운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특히 5월 25일부터 진행될 홈스테이는 독일 학생들이 한국 가정의 일상적인 삶과 따뜻한 정을 직접 느끼는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교장의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는 대목이 있다. 우리 학교는 전국 단위로 학생을 모집하는 마이스터고라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파트너를 집으로 데려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쉬워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아른거린다.
직항 아닌 긴 비행, 그 너머에서 만난 진심
이 우정의 연대기는 사실 예산과의 사투였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 현장체험은 학교 예산과 강남구청 지원, 서울시교육청 공모 사업비 세 축으로 겨우 균형을 잡는다. 그 공모가 치열하다. 지난해 우리 학교는 떨어졌다. 15명이던 참여 학생 수를 11명으로 줄여야 했다. 숫자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 아이 한 명의 기회가 사라지는 일임을 교장이라면 안다.
평교사로 시작해 34년간 직업계고 현장을 지켜왔고, 공모를 통해 이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 교장으로서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일은 양보할 수 없는 책무였다. 조금이라도 예산을 아껴 아이들 한 명이라도 더 보내고 싶은 마음에 두바이를 경유하는 저가 항공을 택했던 기억이 선하다. 무려 16시간이 걸린 고된 사전 답사 여정이었다.
하지만 독일에 도착해 브레멘 교육 당국의 뜨거운 환대를 확인하고, 우리 학교와 독일 학교의 공동 관심 분야인 로봇·항공우주 계열 에어버스사와 OHB(브레멘 소재 우주항공 기업) 견학 프로그램을 조율하면서 피로는 이내 자부심으로 바뀌었다. 예산의 부족함은 발품과 진심으로 메우면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 진심이 통했기에 그해 가을 우리 아이들은 독일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국경을 넘은 정을 나누고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TBZ 요르그 메탁 교장이 직접 인솔 단장으로 한국을 찾으면서, 두 학교의 신뢰는 한 겹 더 두터워졌다.

▲기술로 소통하는 교실(지난해 6월)요르그 메탁(Jorg Metag) 독일 TBZ 브레멘 미테 교장이 서울로봇고 실습실을 찾아 양국 학생들이 함께하는 로봇 제어 수업을 참관하고 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기술이라는 공통분모로 하나 된 아이들의 뒷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는 순간이다 ⓒ 오성훈
말로 전한 울림, 몸으로 나눈 교감
지난해 봄, 독일 TBZ 글로벌 현장 체험단이 방문했을 때, 서울로봇고 교정에는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 씨였다. 독일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이 강당에 나란히 앉아 그의 특강을 듣던 모습은 그 자체로 묘한 울림을 주었다. 두 나라 사이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의 경험담을 듣는 동안, 독일 아이들도 한국 아이들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저런 적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도 공감은 통했다.
이 가치 있는 소통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다른 날 운동장에서는 또 하나의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양국 학생들이 함께 어우러진 체육 활동 시간이었다. 언어의 번역기조차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농구공을 패스하고,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며 몸을 부딪치는 동안 교실 안의 낯섦은 눈 녹듯 사라졌다. 서로 언어는 달라도 진한 우정을 나누며 흘린 땀방울은 국경이라는 벽을 너무나 쉽게 허물어뜨렸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지만, 그때 시청각실을 채웠던 다니엘 씨의 진중한 목소리와 운동장을 가득 채웠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지식을 넘어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
참된 배움이란 단순히 교과서 속 지식을 머리로 외우는 과정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닫힌 교실의 창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직접 세상과 부딪치며 타인과 연대하는 법을 배우는 실천의 여정이다. 서울로봇고와 독일 TBZ의 교류가 바로 그러했다.
우리는 로봇이라는 차가운 기술을 매개로 만났지만, 그 안에서 아이들이 만들어낸 온기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 뜨거웠다. 지난해 봄, 시청각실에서 귀로 듣고 운동장에서 몸으로 느끼며 아이들은 나와 다른 문화,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진 이웃을 환대하고 존중하는 법을 스스로 깨쳤다.
어쩌면 로봇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진짜 배운 것은 회로도도, 알고리즘도 아니었다. 나와 다른 사람과 밥을 먹고, 땀을 흘리고, 잠을 자면서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그 단순하고 소중한 사실을 몸으로 익힌 아이들이, 나는 내심 가장 든든하다.
지식의 양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본 아이들은 좁은 줄에서 이탈해 세계라는 광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로봇이라는 차가운 도구를 따뜻한 우정의 매개로 바꿀 줄 아는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세계와 악수할 줄 아는 아이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