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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0 18:46최종 업데이트 26.05.20 18:46

교육감 선거는 '소란', 학생회 선거는 '축제'

어른들이 단일화 싸움에 열 올릴 때, 아이들이 만들어낸 민주주의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우리 학교의 선거는 이미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언제든 교장실 문을 열 수 있는 학교

퇴근 시간을 제법 넘긴 시간, 학생회 담당 선생님의 전화였다. 학생회 임원진이 의논할 일이 있어 교장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였다. 굳이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학생회가 무슨 일이든 언제든 교장실로 찾아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자치 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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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 임원진과의 만남은 학생회장 선거 공보물 부착에 관한 건의였다. 최근 게시판을 정비하면서 대형 선거 공보물을 붙일 공간이 부족해졌으니, 선거 기간만큼은 복도나 주요 출입문에 질서 있게 붙이고 스스로 잘 관리하겠다는 요지였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지난해 이 아이들은 교장실 문을 두드려 음료 자판기 설치를 건의했다. 주변을 스스로 깔끔하게 관리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반신반의하며 허락했지만, 아이들은 그 약속을 흐트러짐 없이 지켜냈다. 그 신뢰가 쌓였기에, 오늘의 건의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교장실 창밖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축구하는 학생들의 에너지가 넘쳐났다. 대모산의 초록에 학생들의 젊음이 포개져 싱그러운 봄내음이 전해졌다. 대모산의 저 초록과 운동장의 아이들은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로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성장하고 있었다. 소란 없는 이 작은 축제가 담장 밖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담장 밖은 지금 선거 '소란'

창밖의 평화로움과 달리, 담장 밖 세상은 교육감 선거전으로 뜨겁다. 34년 차 교사 입장에서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보다 교육감 선거에 더 관심이 간다. 그러나 먹고사는 일에 바쁜 시민들은 교육감 선거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조한 투표율은 이른바 진보나 보수 진영의 '단일화'만 부추긴다. 단일화에 성공한 진영이 이긴다는 공식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육적 고민이나 공약은 뒷전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세를 불려 단일 후보가 되기 위한 안간힘만 남았다.

단일 후보가 되어도 순탄치 않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후보가 출마를 강행하고, 거기에 크고 작은 후보들까지 저마다 뛰어들어 선거판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누가 누군지도 모를 얼굴들이 넘쳐나는 수준이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모인 천 여 명 규모의 단체 카톡방도 연일 소란스럽다. 교육 정책을 공유하는 생산적인 토론방이었지만, 선거 국면에 접어들자 각 후보의 홍보물과 상대 후보 비방 문건으로 도배됐다. 관리자가 제지해 보아도 쏟아지는 물량 공세에는 역부족이다. 선거가 끝나도 이 소란이 일거에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미 단일화 과정의 잡음들이 법의 심판대 위에 올라 있고, 세 불리기를 위해 남발한 온갖 약속들은 향후 교육감직 수행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선거는 '축제'다

소란스럽고 전혀 교육적이지 않은 어른들의 선거와 달리, 서울로봇고의 학생회장 선거는 '축제'다. 3학년 2학기에 현장실습을 떠나는 직업계고 특성상, 우리 학교는 1학기인 6월 중순에 선거를 치르고 2학기부터 임기를 시작한다. 교장으로서 학생회장 선거를 지켜보면 흐뭇하기 이를 데 없다. 학교생활에서의 평소 고민들이 공약으로 제시되고, 기발하고 재미있는 선거운동이 펼쳐진다.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개표방송도 있다. 당선된 임원들은 리더십 캠프를 통해 스스로 연간 프로그램을 짜 나간다.
2025 학생의 선택" - 서울로봇고 제33대 학생회장 선거 개표방송 화면 개표율 51.7%, 기호 2번 이승섭 후보가 49.3%로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실시간 개표 상황이 유튜브로 생중계되고 있다. 서울로봇고 방송반이 직접 제작 송출한 화면에는 후보별 득표율이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2025 학생의 선택" - 서울로봇고 제33대 학생회장 선거 개표방송 화면개표율 51.7%, 기호 2번 이승섭 후보가 49.3%로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실시간 개표 상황이 유튜브로 생중계되고 있다. 서울로봇고 방송반이 직접 제작 송출한 화면에는 후보별 득표율이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 오성훈
이들의 자치 문화는 지난해 스마트기기 사용 규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학생들은 단순히 "휴대폰을 돌려달라"고 떼쓰지 않았다. 워크숍에서 밤늦도록 난상토론을 벌이며 '자율 징계 방안'을 스스로 마련해 왔다. 수업 외 시간의 자율을 보장받는 대신, 규칙을 어기면 학생회가 직접 캠페인을 벌이거나 디지털 시민 교육을 주관해 책임지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권리에 따르는 책임을 스스로 정의할 줄 아는 시민으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 한자리에 모여 시끌벅적하게 토론하는 우리 학교만의 고유한 민주적 의사결정 모델, '난리법석 대토론회'로 이어졌다. 누군가 규칙을 강요하거나 결론을 내려주지 않았다. 찬성과 반대가 뒤섞인 목소리들이 부딪히고 또 부딪히며 스스로 합의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우리 학교에서는 하나의 수업이었다.

이제 우리 학교는 다시 한번 중요한 민주주의의 여정을 시작한다. 오늘(20일) 제34대 학생회 정·부회장 선거 실시 계획이 공고됐다. 후보자 등록부터 토론 영상 녹화, 전교생이 참여하는 직접 투표까지 약 한 달간의 대장정이다. 벌써부터 아이들은 지난해 유튜브 실시간 개표방송 중 발생했던 외부인의 '직업계고 폄하 댓글'을 차단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어른들의 걱정보다 훨씬 깊고 성숙하다.

눈부신 비상, 어른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직업계고는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현장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영 마이스터(Young Meister)'를 키우는 곳이다. 어제 선거 공보물 부착을 건의하러 찾아온 아이들, 밤새 자율 징계안을 만들어온 아이들이 바로 그 영 마이스터들이다.

학교 정문에 걸린 학부모회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선생님"이라는 현수막 문구처럼, 우리 학생들 또한 존재만으로도 학교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다. 학교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 관계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신뢰'와 '자치'다. 꼬인 전선을 어른이 대신 풀어주기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풀 수 있도록 곁에서 슬쩍 빛을 비춰주는 것-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서울로봇고의 '난리법석' 민주주의.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공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우리 아이들의 이 눈부신 비상을, 교육감 후보들을 포함한 이 사회의 모든 어른에게 당당히 자랑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교육감선거#학생회장선거#민주시민교육#서울로봇고#직업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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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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