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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겁고 우울하다. 남 이야기가 언젠가 내 사연이 돼 남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염려스럽고 걱정이 들면서도, 덤덤한 마음도 함께 자리한다. 한 날 한 시, 세 사람 사정 이야기를 들으면서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다 점심을 같이 하던 분이 난데없이 꺼낸 말에 적잖이 놀라웠다. 암으로 5년 밖에 못 산다는 말과 함께 사는 그날까지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무어라 위로의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듣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연락은 문자로 받았다. 아주 친한 친구가 췌장암 수술을 했다는 것과 그 아들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더군다나 그 아들은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 놓은 상태였다니 친구 심정은 어땠을까.
마지막은 형으로부터 전화로 들은 이야기. 유일하게 남은 핏줄인 고모님 건강이 우려스럽다는 것. 이날 두어 시간 간격으로 직접 대화로, 문자로, 전화로, 들은 소식은 길을 걷는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에 떠올라 한 시간을 넘게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점방

▲지리산둘레길지리산둘레길 오미~송정 구간을 걷는 토요걷기 회원들. ⓒ 정도길
지난 5월 19일,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 열 번째 오미~송정 구간을 걸었다. 약 10.4km 길은 마을골목길, 농로, 임도 그리고 숲길로 다채로운 길들로 이어진다. 구례군 토지면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숲 사이로는 섬진강 풍경도 조망할 수 있다.
오래전 산불 발생으로 아직도 상흔을 안고 있는 지리산 생태를 관찰하면서 자연환경의 중요성도 인식하게 된다. 평탄한 길만 걸었던, 아홉 번째 난동~오미 구간과는 달리, 숲길이 많아 그늘 속에 편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 막바지 약 1km 구간 오르막길은 체력을 안배하며 걷는 것이 중요하다.

▲구례들녘넓게 펼쳐진 구례들녘이 풍요롭다. ⓒ 정도길
출발지는 구례 3대 전통 고택 중 두 곳이 있는 운조루와 곡전재가 있는 오미마을이다. 구례들녘은 우리밀 수확이 한창이다. 지난주까지 꼿꼿이 서 있던 밀밭은 모내기를 위해 1주일 만에 쓰러진 모습이다. 문수골 삼거리에 작고, 아담하고, 예쁘장한 집 한 채가 눈길을 끈다. 시골 구멍가게 역할을 하는 작은 점방에 불과하지만, 오미수퍼라는 간판을 달았다.
코흘리개 시절, 점방에 들렀지만 돈이 없어 군침만 흘리다 주인장한테 쫓겨난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어찌 그리 못살아서 먹고 싶었던 과자 하나 사 먹지 못하였는지. 골목길 벽화 '내집점빵'에 메뉴 대신 '한 잔은 보약'이라 적어 놓았다. 분위기로 봐서 막걸리 딱 한 잔 걸치고 갔으면 좋겠다.

▲오미수퍼작은 구멍가게가 엣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정도길
오미마을과 내죽마을을 지나 언덕길을 오르니 제법 큰 저수지 문수제가 나온다. 이 저수지는 농업용으로 지리산 자락 아름다운 풍광과 맑은 계곡을 품고 있어 피서지로 잘 알려져 있다. 호수 같은 잔잔한 물은 에메랄드빛보다 더 진한 색깔로 싱그럽기 그지없다. 사진을 찍으려니 회원 한 분이 말을 건넨다.
"다음 주, 한전에서 전봇대랑 전깃줄을 다 치워 주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생각지도, 짐작지도 못했는데, 다른 회원 한 분이 해석을 겸한다.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는 그림에 전봇대와 전깃줄은 꼭 넣어서 그렸는데, 또 전깃줄 위에는 참새 몇 마리도 덤으로 그려 넣었는데."
그제야 전깃줄 치워 준다는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드는 생각이 의문이다. 그림에는 전봇대랑 전깃줄이 잘 어울리는데, 사진에는 왜 거치적거리게 느껴질까.

▲문수제쪽빛보다 더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저수지에 푹 빠졌다. ⓒ 정도길
양말 벗고 계곡물에 발 담그니
문수제를 지나 단산윗길로 걸으니 주성윤 시인의 '풀'이라는 시비가 있다. 짧은 시인데도 몇 번을 읽어봐도 느낌을 알 수 없어 이해하려 애쓰는 내 모습이 가련하다. 그럼에도 시상에 젖는 시간, 힘들 때 잠깐만이라도 피로감을 줄여주는 것만 같다.
구례들녘은 뻥 뚫린 끝없이 펼쳐진 모습으로 풍요롭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경운기를 모는 할아버지 모습도 정겹다. 꼬마들이 방역차량 연기를 뒤쫓아 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회원들의 몸짓이 재밌기도 하다. 숲길로 접어드니 녹색 잎이 무성한 세상이다.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에서 잠시 쉬어간다.

▲기념사진지리산둘레길 오미~송정 구간을 걷는 토요걷기 회원들. ⓒ 정도길
걸은 지 3시간 반 만에 점심시간이다. 이 구간에는 식당이 없어 간단하게 차린 김밥으로 요기를 채웠다. 5년 여생 밖에 안 남았다는, 같이 자리한 회원 말에 숙연해진다. 도시에서 시골로 살러 온지 10년차인 나는 지난 세월 무엇을 했는지 또렷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모습이다. 5만 원 권 지폐 한 장 풀면 잔돈 남듯, 1년이란 시간이 꼭 잔돈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어렵거나 새로운 일에 직면했을 때,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말로 다짐한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지리산둘레길지리산둘레길 오미~송정 구간을 걷는 토요걷기 회원들. ⓒ 정도길
편안한 숲길은 이어진다. 산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멀리까지 들려온다. 섬진강이 부르는 사 분의 삼박자 노래 소리처럼 들리는 강물 소리다. 우거진 숲에 가려 탁 트인 섬진강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나뭇가지 사이로 슬쩍 스쳐보며 지나가는 수밖에.
송정계곡에 이르니 30여 명 쯤 돼 보이는 단체 모임이 시끌벅적하다. 산속에서까지 꼭 이동식 마이크로 기계음 소리를 내며 소통해야할까 싶다. 양말을 벗고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함이 뼛속까지 전해온다. 다시 걷는 길, 차량 엔진오일을 교환한 듯 걸음은 부드럽고 순탄하게 나아가고 있다.

▲섬진강나뭇가지 사이로 살짝 만큼만 보여주는 섬진강. ⓒ 정도길
여전히 남아 있는 산불의 흔적
금번 구간 난코스인 오르막길이다. 관리자는 100여 미터 오르고 그 다음으로는 쭉 내리막길이라는 안내 설명이다. 숨이 찬 회원들은 선두와 멀어진다. 편백나무 숲에서 풍기는 피톤치드 향이 피로감을 덜게 해 주는 느낌이다.
앞선 일행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100미터를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출발지에서 5시간을 걸어 의승재에 도착했다. 후미는 10분이나 뒤처져서야 합류했다. 의승재는 정유재란 당시 구례지역 의병과 승려들이 왜군에 맞서 싸운 역사적 장소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구간 쉼터이자 반환점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의승재정유재란 당시 구례지역 의병과 승려들이 왜군과 맞서 싸운 역사적인 장소다. ⓒ 정도길
이제부터 종착지까지는 내리막길이다. 울창한 숲길은 걸음이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더해 한층 편안함이 느껴진다. 길 양옆으로 수령 몇 십 년은 돼 보이는 소나무 밑 부분이 새까맣다. 오래전 발생한 산불로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이다.
자연의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부주의한 사람으로 인한 산불은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잠깐 하는 순간 길 아래로는 낭떠러지 길이 나타난다. 안전망이 없는 길이라 긴장하며 걸어야 한다. 얼마 전 산행 중 일어난 인명 사건이 생각난다. 조심하고, 신경 쓰고, 긴장하며 걸어야 하는 게 산행길이다.

▲불탄 소나무.오래전 발생한 산불로 아직도 상흔을 안고 자라는 소나무. ⓒ 정도길
울창한 숲길에서 나오니 탁 트인 아스팔트길이다. 오미마을에서 종착지인 송정마을에 도착했다. 햇빛이 눈부시고 뜨겁다. 긴장이 풀려 그런지 피로감이 몰려온다. 이럴 때 얼음물이라도 마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아니나 다를까 구세주가 나타났다.
주관부서에서 아이스 바를 하나씩 준다는 것이다. 시원함에 달콤함까지 더한 맛은 하루의 피로를 씻겨 주기에 충분했다. 출발지인 운조루유물전시관까지 회귀는 군내버스로 이동했다. 열 번째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 오미~송정 구간 10.4km는 6시간을 걸어 마쳤다. 회원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고생한 자신의 몸과 두 다리에 박수를 보내며 다음 주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섬진강송정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 ⓒ 정도길
■ 지리산둘레길 오미~송정 구간 경유지 및 시간표(총 10.4km, 6시간 00분)
● 오미마을 운조루유물전시관(09:10) ~ 구례군노인전문요양원(10:35, 4.5km) ~ 점심시간(11:25~12:25) ~ 원송계곡(13:12, 2.7km) ~ 의승재(13:55) ~ 송정계곡(1.4km) ~ 송정마을 버스정류소(15:10, 1.8km) / 약 10.4km
● 방향 : 역방향 걷기
● 전화문의 : 사단법인 숲길(055-884-085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여행, 인생여정>에도 실립니다.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여행, 인생여정>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