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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기획전에는 없고 소장품전에는 있는 것은? 정답은 바로 스토리다. 대형기획전이나 상설전, 혹은 개인전과 같은 전시에도 물론 큰 흐름의 스토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시장을 채운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방대한 스토리는 소장품전만 한 게 없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늘 소개할 더 프리마 아트센터에서 지난해 8월 25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열리는 전시 '근현대회화 블루칩 작가전'과 '소중현대'가 그렇다. 더 프리마 아트센터는 작년 5월에 개관했다. 컬렉터로 유명한 프리마호텔의 이상준 대표가 설립, 현재 고 이우복 회장의 소장품과 이상준 대표 자신의 컬렉션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이곳에 관심이 갔던 것은 2023년 5월, 70억 원(수수료 제외)에 낙찰돼 한국 고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조선 시대 청화백자 '백자청화오조룡문호' 때문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경매가를 기록한 청자의 모습이 궁금하여 향했던 발걸음이었는데 정작 청자보다 먼저 눈길이 갔던 건 3층의 전시실이었다(전시회 글을 두 번에 나눠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인들의 사랑방 같았던 3층 전시실
내가 전시를 관람하러 갔던 날은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연등 행사가 열리는 날이라 가뜩이나 사람으로 북적이는 인사동이 더 북새통이던 날이었다. 혼잡했던 골목을 지나 아트센터로 들어서니 문밖의 분주함이 다른 세상 이야기인 양 느껴졌다.
고요하게 앉아있는 1층의 도자기들, 그 차분함에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전시는 지상 3층에서 지하 1층까지 이어졌는데 가장 보고 싶었던 도자기를 맨 마지막에 보기로 하고 먼저 지상 3층으로 향했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도자기란 생각에 대충 둘러만 보고자 했던 생각은 3층의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더프리마아트센터 개관전 '근현대회화블루칩 작가전'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전시장 ⓒ 은주연
혹시 도상봉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한국의 1세대 근현대화가 도천 도상봉(1901~1977). 아래채와 위채로 나뉘어져 있던 명륜동 그의 집 2층은 일명 미술계 사랑방이었다는데 여기 3층은 꼭 그 시절 그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었다.
연애하다 생긴 고민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천경자와 백자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도상봉과 의기투합했다는 김환기, 그리고 김상유 김기창 윤형근 등등. 그들의 그림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느낌이랄까. 그들의 아지트가 이랬을까.
그중에서도 눈길을 끌었던 것은 김환기의 작품 Le Ciel(하늘) 이었다. 이 그림은 이상준 대표가 1억 2천만 원에 샀다가 옥션 경매를 통해 3억 5천만 원에 팔고 다시 5억 원이라는 높은 가격을 주고 되산 그림이라는 비화도 품고 있다.
파리에서 세 딸을 그리워하며 그렸다는 이 그림, 이 그림을 그린 아버지 김환기의 마음과 그 애틋함이 눈에 밟혀 도로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다는 컬렉터의 마음까지 서려 이 그림 속의 파란 색감(환기 블루)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김환기 'Le Ciel'김환기가 파리에서 수학할때 한국의 세 딸들에게 보낸 그림 ⓒ 은주연
그러나 그보다 더 눈길이 갔던 건 김환기의 그림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던 사위 윤형근의 그림이었다. 나는 사실 윤형근이라는 작가를 얼마 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청다색이라는 고요한 색감과 미니멀한 선을 추구하는 그림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발견이었는데, 한국 추상화의 거장 김환기의 가족이었다니.
김환기에게 윤형근은 사위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제자였고, 윤형근에게도 김환기는 장인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스승이었다. 윤형근이 스승인 김환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장인의 죽음 이후 윤형근의 그림에서는 모든 화려한 색채가 사라졌다.
그가 쓴 컬러는 블루와 엄버인데 블루는 장인 김환기를 상징하는 맑고 푸른 하늘의 색이고 엄버는 거칠고 투박한 땅의 색이다. 마치 썩은 나무나 까맣게 타버린 숯과 같은 청다색. 그가 즐겨 쓴 청다색이 뿜어내는 자태도 품위 있었지만 그의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좋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빛깔이 싫어져서 빛깔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선도 되도록 간결하게 둘, 셋 또는 하나로 줄여나가고 있다. 그림이 반드시 색이 많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지 않나. 내면이 아름다운 것이 진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 <윤형근의 기록>, 2025, 컬러, 무음, 8분 17초, 제작 : 더 도슨트,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Umber-blue윤형근은 김환기의 사위이다. 김환기의 그림과 나란히 걸려있다 ⓒ 은주연
윤형근의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도 상설 전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국립현대미술관만큼의 큰 사이즈의 그림은 없었지만 청다색의 고요한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윤형근의 그림이 이렇게 김환기의 그림과 함께, 더군다나 파리에서 딸들에게 보냈던 그림과 함께 걸려 있으니 그 가족의 애틋함이 공간을 채우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이게 바로 소장품전의 묘미구나 싶었다.
BTS RM이 남겨둔 흔적도
3층의 전시는 87년생 라선영의 조각작품 <쿠팡맨>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라선영은 사회적 지위나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같은 크기로 조각하여 지구상의 70억 인구를 모두 기록하겠다는 장대한 목표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작가다.
재미있었던 것은 의미와 재미를 모두 잡은 이 컬러풀한 조각 작품이 몇십 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이질감 없이 느껴졌다는 것. 꼭 50,60년대 도상봉의 아지트에 숨어든 80년대 작가를 보는 기분이랄까.

▲라선영 <쿠팡맨>70억 지구인을 조각하겠다는 라선영 ⓒ 은주연
참. '근현대회화 블루칩 작가전'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전시에 꼭 있다는 그것. 미술 애호가 BTS의 김남준의 발길이 이곳에도 닿았다는 사실. '장미의 작가'라고도 불리는 황염수의 그림이 그것인데 안그래도 소박하게 오도마니 놓인, 반듯하지도 않은 비뚜름하고 무심했던 도쿠리 그림이 눈길을 끌던 참이었다.
그 조그만 그림이 좋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시 관계자가 지나가며 건네는 한 마디가 RM도 이 그림을 좋아했다는 말이었다. 어머나, 이럴수가. RM이 인정한 그림이었네. 반가워서 방명록에 RM 김남준이 다녀간 흔적을 찰칵, 찍어보았다.

▲김남준의 방명록김남준이 인증한 전시회 ⓒ 은주연
- 이어질 두 번째 글은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