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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큰 방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들 종이가 잔뜩 쌓인 책상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각자 앞에 놓인 종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숨 가쁘게 넘어가고 있었다. 가끔 "천천히 해요"라는 말이 들렸지만 아무도 손을 늦추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숨을 쉴라치면 금세 종이가 옆에 수북이 쌓이는 통에 손을 늦추려야 늦출 수도 없었다. 벌써 몇 시간째 이렇게 작업하고 있었지만 일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셨다. 하지만 아직 뜯지 않은 종이 더미가 책상 밑에도 벽을 따라서도 잔뜩 있었다.

지난 23일, 6.3 지방선거 투표 공보물 발송 아르바이트를 했다. 몇주 전 선거 공보물 발송 작업 인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원했다. 토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수당은 9만 원 정도였다. 5시간 일하고 9만 원이면 시급이 1만 8000원인 셈이었다. 잠깐 일하고 쉽게 돈 버는 '꿀알바'라고 생각했다.

'아침 든든히 먹고 오세요'라는 말에서 읽은 것

 2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집배원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공보물을 배달하고 있다.
2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집배원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공보물을 배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하기로 한 주에 안내 문자가 두 차례 왔다. 월요일, 첫 번째 문자는 별다를 것 없었다. 평범한 장소, 시간 안내였다. 오전 8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니 오전 8시 10분까지 오라고 했다. 그런데 목요일 문자는 달랐다. 작업 종료 예정 시간이 애초의 오후 1시에서 오후 2시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괄호 속 '예정'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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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부족한지 밑에 '이번 선거는 공보물 작업량이 많아 종료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아침을 든든하게 드시고 와주세요'라는 말까지 덧붙어 있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오라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월요일 문자에도 작업량이 많다는 언급이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얼마나 많기에 그러는 걸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이 일을 너무 쉽게 본 건 아닐까?'

토요일 아침, 집합 시간에 빠듯하게 맞추어 나왔기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주민센터가 가까워질수록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하는 사람들이 한둘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주민센터 앞에 이르자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 일이었나?'

생각할 틈도 없이 집합 장소인 3층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머리 물결과 마주쳤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한쪽 방에는 출석 체크를 하고 조 배치도를 확인하려는 사람들, 다른 방에는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복도에는 지금 막 들어오는 사람들로 3층 전체가 사람들로 터질 듯했다.

밀려오는 사람들 틈에 간신히 출석 체크를 하고 다른 방으로 갔다. 길게 늘어선 작업대 위아래에 종이 꾸러미가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있었다. 옷과 가방을 따로 둘 곳이 없어 창턱이란 창턱은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받은 생수와 간식 꾸러미도 둘 곳이 없어 일단 옷으로 둘둘 싸서 창턱 한쪽 구석에 밀어 놓았다.

일을 지휘하는 공무원이 작업 전 안내 사항을 말해 주었다. 작업량이 많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했다. 안내문에 말한 2시도 넘길 가능성이 컸다. 공식적인 점심시간도 없었다. 일하다가 짬을 내어 김밥 먹을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예전에 공보물 작업을 해 봤다는 사람들도 이번 작업량이 엄청나다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처음이라 이 일이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은 분명히 떠올랐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일하러 온 다른 사람들도 다들 이건 너무 낭비라고 한 마디씩 했다. 시대는 이미 AI가 거의 모든 것을 대체하는 21세기인데 선거 작업만은 여전히 20세기다. 어지간한 서류, 증명서는 사람 얼굴을 볼 필요도 없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도 사람 목소리 듣기가 힘들 정도인데, 유독 선거 공보물만 여전히 종이를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

찾아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낭비라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럼에도 계속 종이 공보물을 고집하는 이유는 있을 것이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경우 분명 종이가 더 편하고 보기 쉬울 것이다. 고령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이니 종이 공보물 수요도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나 많은 공보물을 준비하는 데 대한 이유로는 납득되기 어렵다.

반복되어 온 '낭비' 지적, 왜 계속될까

 2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우편함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공보물이 꽂혀 있다.
2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 우편함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공보물이 꽂혀 있다. ⓒ 연합뉴스

게다가 정치란 극히 호불호가 갈리는 영역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굳이 이런 공보물이 아니어도 찾아보지만, 관심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공보물을 갖다 주어도 보지 않는다. 실제로 선거 공보물을 받아도 뜯지도 않은 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지난 2월 26일부터 3월 31일까지 선거권이 있는 국민 682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2.7%가 전자공보물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공보물 활용 방식은 '대충 훑어봄'이 52.2%로 가장 많이 차지했고, '봉투째 버림' 18.8%, '읽지 않음' 17.5%로 이어졌다. '자세히 읽음'은 11.4%였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선거철 공보물 홍수보다는 평소 정치에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정책을 펴 나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환경적으로도 재앙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공보물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데, 더 심각한 것은 버려지는 공보물 양도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실제 이날 작업 후 쌓인 공보물은 작업대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각 선거구 당 발송해야 할 공보물 양이 정해져 있을 텐데 거기에 맞는 양을 보내면 되는 일 아닐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양이 남는 걸까? 남은 수량도 들쭉날쭉해서 어떤 후보자는 공보물이 부족해서 작업이 지연될 정도였고, 어떤 후보자는 남아돌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돈을 버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처리하니 인건비도 어마어마하다. 이래저래 이 돈이 모두 우리가 내는 세금이라고 생각하니 돈을 번다 해도 마음이 썩 가볍지도 않았다.

작업을 하며 너나 할 것 없이 '낭비'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이런저런 대비책도 들렸다. 온라인으로 공보물을 보는 방법, 신청자에게만 발송하는 방법 등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사정을 듣자 하니 신청자에게만 선택 발송하자는 소리도 나온 지 꽤 된 듯했다. 그런 지적이 반복되었는데도 여태껏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유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일은 두 시 반 정도에 끝났다. 다들 서두른 덕에 다행히 세 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너무 아팠다. 주민센터를 나오니 어느새 여기저기에 후보자들 얼굴 사진이 붙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작업했던 종이의 이름을 다시 보니 반갑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언제까지 선거철만 되면 이런 종이 홍수에 시달려야 할까? 이제는 이런 낭비를 끝낼 때도 되지 않았을까? 부디 다음 선거에는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와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선거#선거알바#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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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주 (romain1) 내방

아주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내 몸과 정신을 적시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이런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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