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20일 일본 여행 중 첫날 교토 서쪽을 돌았다면 둘째 날은 동쪽 코스로 이동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택시에 실려 가는데, 문득 둘째와 며느리에게서 "어머니, 오늘은 어디 가세요?" 하고 톡이 왔다. "나도 모른다"고 답을 보내며 피식 웃음이 났다. 큰아들은 엄마가 그저 그때그때 마주하며 놀라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일부러 미리 일정을 공개하지 않는단다. 아들의 깊은 뜻(?) 덕분에 나 역시 매 순간 서프라이즈를 즐기며 기분 좋게 웃었다.
택시 안에서 아들이 "가능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주세요"라는 문장을 번역기로 돌려 기사님께 보여주었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선 곳은 이른 아침인데도 이미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바글거리는 교토의 상징, 청수사(清水寺)였다.

▲교토청수사 ⓒ 김성례
'맑은 물의 사찰'이라는 이름답게, 입구 에서부터 교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본당까지 이어지는 길목에는 빼곡한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김없이 끝없는 수학여행 학생들의 교복 행렬을 마주했다. 절벽 위에 세워진 본당 건물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139개의 거대한 나무 기둥으로만 지어졌다는데 그 위용이 대단했다.
건강, 연애, 학업을 상징하는 세 줄기의 신성한 폭포수를 마시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는 아들과 함께 그늘에 앉아 사람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학생들 따라 우리도 오이 절인 것과 시원한 말차 아이스크림 하나를 베어 물고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길은 참 여유로웠다.

▲교토청수사 신성한 폭포수 ⓒ 김성례

▲교토오이 절임 간식과 말차 아이스크림 ⓒ 김성례
한적한 골목에서 만난 뜻밖의 인연
복잡한 상가 골목을 벗어나 조용한 길로 접어들자, 아들이 소곤거리며 주의를 주었다. "엄마, 지금부터는 특유의 경상도 하이톤 목소리를 조금 낮춰야 해." 일반 주민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전통 목조건물 보존 지구, 이시베코지 골목이었다. 고요하고 아늑한 골목 사이로 드문드문 찻집이 보였고, 기모노를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조심스레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적한 골목길을 돌아 나와 야사카 신사를 거쳐 아들이 점찍어 둔 점심 식당으로 향했다. 미쉐린 출신의 젊은 셰프가 운영하는 작은 일본식 가정식 집이었는데, 맛집 답게 30분 정도의 웨이팅이 필요했다. 마땅히 앉을 의자도 없어 길가에 툭 하고 주저앉았는데, 마침 우리 앞 순서로 기다리던 부부와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오래전 캐나다로 이민을 가 두 아들을 키워내셨다는 부부였다. 둘째 아들의 결혼 피로연을 열어주러 한국에 들어가는 길에 잠시 일본 여행 중이라 했다. 나이 대도 비슷한 데다 아들 둘을 둔 처지까지 똑같아, 이런저런 자식 키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30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여행 전날까지 역사도 문화도 예습 한 자 없이 떠나온 흐뭇한 무임승차 여행이었기에, 길 위에서 마주한 이 뜻밖의 대화가 더욱 달게 느껴졌다. 광활한 시공간 속에서 이 머나먼 타국 땅, 작은 식당 앞에서 이렇게 통하는 인연을 만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여행이 주는 묘미이자 참 귀한 선물이었다.
정갈한 점심을 맛나게 먹은 뒤 근처의 사찰 겐닌지(建仁寺)로 발길을 옮겼다. 다시 한번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일본식 정원과 정겨운 다다미 실내를 걸었고, 천장에 그려진 거창한 쌍용 그림의 기세에 압도되기도 했다. 시원한 사찰 마루에 걸터앉아 뚜벅이 여행의 피로를 잠시 풀어낸 뒤, 오늘 여정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인 니조성(二条城)으로 향했다.

▲교토겐닌지 사찰 ⓒ 김성례
꾀꼬리 마루와 천년 수도의 위용
니조 성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아들은 벼락치기 공부를 시켜주듯 일본의 3대 영웅 이야기와 니조성의 관람 포인트를 신속하게 브리핑해 주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온 내 게는 아주 유용한 5분 짜리 쪽 집게 과외였다.
화려하고 웅장한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목조 건물 내부에서 발을 디딜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의 침입을 알아차리기 위해 걸을 때마다 새소리가 나도록 설계된 그 유명한 '꾀꼬리 마루(우구이스바리)'였다. 옆에 지나가던 가이드의 설명을 귀동냥하며 다시 한번 발을 굴려보니 과연 소리가 신통 방통했다.
니조성은 1603년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축성한 곳이다. 일반적인 전투용 성과 달리 화려한 궁궐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에도 막부의 시작과 종말을 모두 지켜본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성에 걸맞게 웅장한 바위들로 멋지게 조성된 정원을 거닐었다.
이어서 천수각 터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니조성 전체와 교토 시내 전경이 사방으로 시원하게 펼쳐졌다. 벌써 후끈하게 달아오른 오후의 열기 속에서도, 높은 터 위로 불어오는 바람만큼은 가슴 속까지 씻어내릴 듯 상쾌했다.

▲니조성정원 ⓒ 김성례
여정의 마무리는 다시 교토 역이었다. 근처 지하철역을 통해 이동한 뒤 저녁으로 그 유명한 동양정의 함박스테이크를 맛보았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이세탄 백화점 11층 스카이웨이에 올라 탁 트인 교토의 뷰를 감상했고, 지하 식품관에 들러 밤에 먹을 소소한 야식 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교토이세탄 백화점 11층 뷰와 주먹밥 간식 ⓒ 김성례
어마어마한 규모의 상점가와 끊임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인파를 보며, 내내 지방 도시에만 살던 내게 천년 수도 교토의 위용이 번잡한 교토 역의 풍경 속에서 다시 한번 묵직하게 다가왔다. 미처 예습하지 못해 더 짜릿하고, 길 위에서 마주한 다정한 인연 덕분에 한층 더 풍성했던 교토의 두 번째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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