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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지리산둘레길 가탄~원부춘 구간을 걷고 있는 토요걷기 회원들. ⓒ 정도길
지난 3월부터 시작한 사단법인 숲길이 주관하는 지리산둘레길 토요걷기가 반을 넘어서면서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총 21개 구간에서 12개 구간을 걸었다. 지리산은 단순한 자연 생태계적 산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품은 삶의 흔적이 담긴 산이다. 마을이 생기게 된 오래된 전설에서부터, <조선왕조실록>의 역사적 장소까지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지리산둘레길은 숲길, 임도, 농로, 마을안길, 그리고 강변길을 품었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게 길이다. 길이 곧 삶인 것이다. 그 길을, 아니 그 삶의 흔적을, 따라가는 지리산둘레길이다.
지난 5월 30일, 지리산둘레길 가탄~원부춘 구간 11.4km를 걸었다. 이 구간은 산자락을 끼고 도는 하동 녹차 밭이 펼쳐져 있다. 농부의 부지런한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차밭 정상에 있는 정금정에서 화개천을 내려다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오죽하면 이곳이 하동 사진 찍기 좋은 핫 플레이스라고 할까. 정금정을 지나서는 세 시간 이상 급경사를 올라야만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21개 구간 중 난이도가 최상급에 속하는 코스 중 하나다. 길은 마을 길, 임도, 숲속 길 그리고 임도가 번갈아 나타나며 지루함을 달래준다.

▲지리산둘레길지리산둘레길 가탄~원부춘 구간을 걷는 토요걷기 회원들. ⓒ 정도길

▲은어낚시이맘때 하동에는 은어낚시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정도길
출발지인 화개중학교 주차장 주변으로는 화개십리벚꽃길이 나 있다. 벚꽃 피는 계절이면 벚꽃나무 꽃비를 맞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가탄교에 이르니 화개천에서 낚시하는 강태공의 모습이 유유자적하다. 은어낚시에 푹 빠져 있다. 은어는 6~8월 사이 수박 향이 진하게 나는 물고기로, 이맘때 하동 은어 맛을 즐기려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재첩국, 참게탕 그리고 녹차는 하동의 명물로 꼽힌다.
가탄마을에 이르니 간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한자로 '길가(吉佳)' 슈퍼라 이름 지은 작은 가게다. 말 그대로 길가에 있는 가게로, 주인장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간다. 전국을 여행하다 보면, 특히 시골에서 오래된 간판을 가끔 볼 수가 있다. 그런 간판에서 느끼는 고향의 정취 같은 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글씨체나 미적인 감각은 시대에 뒤떨어진다지만, 나는 왠지 낡고 오래된 그런 모습에 끌린다. 단순히 사라져 가는 것들이 아닌, 그 안에 우리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기에.

▲길가슈퍼가탄마을에 길가슈퍼라는 간판이 눈길을 끈다. ⓒ 정도길
시골 오래된 간판에서 느끼는 숨은 삶의 흔적
시작점부터 오르막이 계속되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1시간 만에 대비마을에 도착했다. 구전설화에 의하면 김해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지리산 운상원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왕자들의 어머니 허황후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이곳에 대비사를 세웠는데, 그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아들들은 후에 도를 깨우쳐 부처가 되었고, 그곳이 지금의 칠불사다. 칠불사는 지리산 토끼봉 아래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 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 따뜻하다는, '아(亞)'자 방으로 유명하다. 사찰을 찾는 여행자라면 꼭 들러 보기를 권한다.
대비마을 아래쪽 하동야생차 소공인복합지원센터 앞으로는 천년다향길이 나 있다. 여기서는 지리산둘레길과 천년다향길이 겹쳐져 있다. 천년다향길은 차유통센터(정금마을), 정금차밭, 도심마을(도심다원, 유로제다), 신촌마을, 혜림농원, 그리고 차시배지로 이어지는 2코스로 거리는 4km다. 오르막을 오르니 멀리 언덕에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정금정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화개천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천상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아쉽다. 녹차나무를 덮어씌운 검은색 차광막 때문이다. 이유가 궁금해서 물으니 강한 햇볕을 받으면 잎이 두껍고 딱딱해지기 때문이란다. 어딜 가든 늘 아쉬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기서도 깨치게 된다.

▲대비마을김해 가락국 허황후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오는 대비마을에서 잠시 쉬어간다. ⓒ 정도길

▲화개천풍경정금차밭이 있는 정금정에서 내려다보는 하동 화개천 풍경이 장관이다. ⓒ 정도길
정금정에서 차시배지까지는 3.4km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오르막구간이다. 세 시간을 걸어야 평지를 만날 수 있다. 중촌마을 입구 삼거리에서는 지리산자연인마을인 회경동힐링센터(2.0km)와 하늘호수 쉼터로 가는 길이 갈라진다. '하늘호수 차밭쉼터'라는 작은 팻말에는 '걸어서 200걸음'이라고 적어 놓았다. 나는 사찰이나 등산로를 오를 때 계단 수를 세는 습관이 있다. 200걸음이 맞는지 세웠는데, 207걸음이다. 나중에 주인장 말로는 걸음 수는 제각각이란다. 어떤 이는 190걸음이고, 어떤 이는 210걸음이라고 한다. 걸음 하나에, 숫자 둘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동 사진 찍기 좋은 핫 플레이스... 정금정에서 보는 화개천 풍경이 장관
하늘호수 차밭쉼터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쉼터다. 입구에는 지리산둘레길 스탬프가 있다. 열 두 번째 도장을 찍었다. 쉼터 외관은 허름하지만 정겨움이 묻어난다. 지붕은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들었다. 지나온 삶의 흔적이 엿보인다. 나무 테이블과 의자는 주인장 할아버지가 손수 깎아 만든 손때가 묻은 작품이다. 백발의 할머니 미소가 백만 불짜리다. 할아버지 흰 수염은 그 반쯤은 돼 보인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생글 발랄한 표정과 달리 말없는 무표정으로 작품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 같이 사진 한 장 찍자하니, 외려 떨어져 각자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단다.

▲부부하늘호수 차밭쉼터 주인장 노부부 모습이 아름답다. ⓒ 정도길
이른 점심은 김밥으로 채웠다. 쉼터 앞으로 좌우로 길게 펼쳐진 풍경에 빠져 있는데, 나비 한 마리가 내 팔에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 그러려니 하는데 나비는 진지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날아가지 않는다. 신기함을 넘어서 신비롭다. 한 회원이 말을 건넨다.
"옛날 지리산에 살았던 애인이 찾아 온 거 같은데, 혹여 지리산 애인을 차버리고 떠난 것 아닌가요?"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런 추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답을 아니 할 수 없었다.
"2년 전 이맘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오신 것 같네요."
팔에 붙은 나비는 20분이나 넘게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 하도 신기해서 약 30미터 떨어져 있는 다른 회원들한테 보여 주기 위해 걸어가도 날아가지 않는다. 회원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한 마디씩 거든다. 나비는 나의 어머니라고 우기는 내 모습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이었을까.

▲환생나비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비로 환생한 듯, 날아가지 않고 있다. ⓒ 정도길
하늘호수 차밭쉼터 노부부와 나비로 환생한 어머니 이야기
오후 걸음과 함께 나의 어머니 나비는 푸른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급경사로 숨이 차고 헐떡거린다. 그동안 팀을 이끌었던 실장님이 사정상 참석하지 못하고 다른 분이 팀을 이끌었다. 앞선 팀장과 달리 좀 여유 있게 이끄는데도 자꾸 뒤쳐진다. 땅만 보고 걷고 또 걸을 뿐이다. 나뭇가지를 잡아 당겨보지만 거기서 거기다. 선두그룹은 후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 뒤에도 회원 몇몇이 따르고 있다. 얼마나 올랐을까, 선두 무리가 높은 곳에서 힘들고 지친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괜히 민망하고 면목 없고 주눅이 든다.
중간 중간 내리막길이 없는 오르막 구간 끝에 닿았다. 형제봉임도삼거리 전방 약 150m에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급경사만 꼬박 세 시간을 걸었다. 그늘진 어두운 곳에서 환한 밖으로 나가니 별천지 세상이다. 나무와 잎으로 동그랗게 뚫린 큰 구멍이 곧 천국으로 가는 문이다. 나는 '천국의 문'이라 이름 지었다. 회원들이 다들 그럴싸하다 말한다. 스틱을 빌려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자세가 엉성하다고 스틱을 엑스자로 교차하란다. 이런 포즈는 처음이라 몇 번 시도 끝에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지리산풍경힘든 걸음으로 피로해진 몸을 풀어주는 지리산 풍경. ⓒ 정도길

▲천국의 문세 시간 오르막 구간을 걸어 평탄 길이 나타나는, 형제봉임도삼거리 입구에 있는 천국의 문. ⓒ 정도길
여기서부터는 오르막이 없다 보니 회원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을 즐겼다. 가져온 간식도 서로 나눠 먹으면서 지나온 걸음에 대한 숨은 이야기도 풀었다. 형제봉임도삼거리에서 형제봉활공장까지는 임도가 나 있는 약 3.5km 거리다. 다시 활공장에서 약 1.5km 걸으면 형제봉(해발 1116.2m)이다. 형제봉에 서면 박경리 작 소설 <토지> 주 무대인 평사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흐르는 섬진강 풍경은 덤이다.
형제봉임도삼거리에서 발걸음을 돌려 종착지인 원부춘마을로 향한다. 시멘트 포장길 임도는 내리막길로 힘들지 않게 걸었다. 원부춘 마을은 고려시대 원강사라는 절이 있어 부처골로 불리었는데, 부춘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전한다. 지리산둘레길 가탄~원부춘 구간 11.4km를 6시간 30분을 걸었다. 다른 구간보다 좀 더 힘들었음에도 걸음은 무사히 마쳤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계곡 물에 발을 담그니 피로가 한층 풀린다. 다음 주도 힘든 구간이 예정돼 있다.
● 구간거리 및 소요시간
가탄마을(09:35) ~ 백혜마을(1.1km) ~ 대비마을(10:32, 1.0km) ~ 정금차밭(1.5km) ~ 정금정(10:52) ~ 중촌마을(11:23, 1.2km) ~ 점심시간(11:30~12:30) ~ 형제봉임도삼거리(14:35, 2.5km) ~ 원부춘마을(16:05, 4.1km)0.7km)/ 11.4km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여행, 인생여정>에도 실립니다. 개인사진은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